'진보의 아이콘' 긴즈버그…4번째 항암 치료받고 건재 과시
[인물탐구]
뉴욕 버팔로대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깜짝 등장
성차별 대항, 소신 판결, 아이돌같은 팬덤 인기
은퇴땐 대법원 보수화 우려…美 정계 시선집중
말·말·말
"내가 6개월 안에 죽을 것이라고 한
공화당 의원은 죽었고 난 잘 살아 있다
할 수 있는 한 일을 계속 할 것이다"
건강 문제로 은퇴할지를 두고 미국 정가를 긴장시켰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원 대법관이 네 번째 항암치료를 마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26일 긴즈버그 대법관이 3주간의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처음으로 대중 행사에 등장했다. 그는 얼마전 암 치료를 시작해 참석 여부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를 씻고 뉴욕주 버펄로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 건재함을 과시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이날 행사에서 "내 나이 86세에 전 연령의 사람들이 나와 사진을 찍자고 하니 놀랍다"며 자신이 '악명'높다면 1960∼1970년대 법률가로 살아온 행운을 누린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시절은 남성과 평등한 지위의 인간으로서 여성이 법앞의 평등과 정의를 요구하던 때였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1999년과 2009년, 지난해에 이어 이달 초 췌장에 종양이 발견돼 암 치료를 진행했다. 그의 건강은 미국 사회에서 초미의 관심사다. 대법관들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분류되기를 거부하나, 그는 9명의 대법관 중 진보 성향 대법관의 리더로 여겨지고 있다.
긴즈버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미 정부 정책과 사회·문화 규범의 방향키를 쥔 대법원의 이념 균형이 심각하게 무너진다. 미 대법원은 보수 성향 대법관 5명과 긴즈버그를 포함한 진보 성향 대법관 4명이 포진한 구도이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긴즈버그가 낙상해 갈비뼈 3개가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었을 때 온라인에는 "당신은 (트럼프의 재선까지 감안해) 5년간 절대 죽으면 안 됩니다" "내 수명의 몇 년을 떼 드릴게요" "갈비뼈는 물론 콩팥까지 기증할 수 있습니다"라는 글들이 올라왔을 정도다.
긴즈버그의 건강 문제뿐 아니라 미국 사회는 키 155㎝에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이 왜소한 85세 할머니에게 열광하고 있다. 그는 이름 앞글자를 따서 '악명 높은 RBG'(notorious Ruth Bader Ginsburg)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아이돌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가 "RBG는 이 시대의 밈(meme·유전이 아니라 모방을 통해 습득되는 문화 요소)"이라고 평하고, 폴리티코는 "RBG 컬트(특정 대상에 열광하는 문화 현상)"라고 언급할 정도다.
이날 '깜짝 참석'을 통해 '악명 높은 RBG'라는 유명함에 대해 힘있는 목소리로 연설했다. '악명 높은 RBG'는 성차별에 맞서 대법관 자리까지 오른 일생과 소신 있는 판결에 대한 존경의 표현으로 지지자들이 붙인 애칭이다.
판사 시절 여성·성 소수자·이민자와 저소득층 편에 선 판결을 통해 '진보의 아이콘'으로 밀레니얼 세대와 진보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악명 높은 RBG(Notorious RBG)'문구가 새겨진 티셔츠, 머그컵 등이 불티나게 팔리고, 법복에 레이스 칼라와 장갑을 매치한 '긴즈버그 스타일'도 유행이다. 작년 5월엔 CNN 필름이 다큐멘터리 'RBG'도 제작·방영했다.
만약 그가 은퇴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새롭게 보수 성향 대법관을 임명해 대법원이 더욱 보수화될 것으로 관측돼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그의 거취를 주목하고 있다.
미국 대법관은 종신직으로, 대통령 지명을 받고 상원 인준을 거쳐 임명된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1993년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의 지명을 받았다. 미국 역대 대법관 중 4번째로 나이가 많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최근 인터뷰에서 "내가 암에 걸렸을 때 신이 나서 6개월 안에 죽을 것이라고 한 의원(공화당 소속 짐 버닝 상원의원)도 있었지만, 그는 죽었고 나는 잘 살아 있다"며 "할 수 있는 한 일을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