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개 EU 회원국 국경 장벽 설치 비용 요구

'유럽 요새화' 비판 속 "난민 위한 법규정 정비해야"

(서울=연합뉴스) 송병승 기자 = 몰려드는 난민에 유럽연합(EU)이 장벽을 높이고 있다.

EU가 난민을 향해 쌓으려는 벽은 정서적 장벽이 아닌 실제 콘크리트 장벽이다.

2015∼2016년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난민이 대규모로 EU로 들어온 이후 EU 회원국 국경 곳곳에선 난민의 필사적인 진입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벨라루스가 중동에서 이주민과 난민을 데려와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국경으로 몰아내는 '난민 공격'으로 곤욕을 치르자 EU 회원국이 속속 장벽에 눈을 돌리게 됐다.

폴란드 등은 벨라루스 접경 지역에 군경을 배치하고 난민의 진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이울러 이들은 국경 지역에 장벽 설치를 추진하면서 EU에 설치 비용 지원을 요청했다.

지난달에는 이들 3개국과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덴마크, 그리스, 키프로스,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등 9개 EU 회원국도 국경 장벽 설치 계획을 밝히면서 EU 집행위원회에 '긴급하고 우선으로'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촉구했다.

2015년 당시에는 난민 유입을 가장 강경하게 저지하던 헝가리가 유일하게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와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며 비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제 극우파 정권이 들어선 동유럽권뿐 아니라 사민당 정권의 덴마크까지 장벽 설치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678㎞에 달하는 벨라루스 국경선 중 502㎞ 구간에 장벽을 설치할 계획이다. 리투아니아는 EU에 장벽 설치 비용으로 1억5천200만 유로(약 2천40억 원)를 청구했다.

가브리엘리우스 란즈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은 "난민의 목적지는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등 EU 내 다른 회원국이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국경의 장벽은 EU 전체를 보호하는 것이다. 따라서 EU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U 국가 진입을 위한 관문이 되는 그리스는 EU 회원국이 난민을 분산 수용하는 방안에 찬성하지만 장벽 설치도 추진하고 있다. 헝가리는 난민 분산 수용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EU 국경에 장벽을 설치한다는 것은 자유로운 통행을 추구하는 EU의 통합 정신과 맞지 않고 과거 독일 나치 정권의 '유럽 요새화' 구호를 연상시킨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난민 유입사태에 대한 EU의 인도주의적 대응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장벽 설치에 대한 거부감이 점점 약해지는 기류다.

유럽의회는 장벽 설치가 망명권 수용 의무 등을 규정한 국제법에 위배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 의사를 밝혀 왔다. 하지만 최근 유럽의회 내 중도우파인 유럽국민당(EPP)은 EU 국경 장벽 설치 지원에 찬성 입장으로 돌아섰다.

만프레트 베버 EPP 의장은 "우리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장벽 설치 비용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초 EU는 난민 유입을 막는 장벽 건설은 비효율적이라면서 자금 지원을 거부했지만 상황이 더 악화하지 않도록 고육책으로 폴란드 등에 대한 자금 지원을 논의하고 있다.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10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와 만나 "EU 국경 보호를 위한 물리적 기반 시설을 EU 재원으로 마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EU 집행위원회는 EU 국경 지역에 감시 카메라 등 국경통제 장비 설치를 지원할 예정이다.

일부 EU 외교관은 국경 장벽을 설치하면 생명의 위험에 처한 망명 신청자가 강제 송환될 수 있다면서 이는 국제법에서 금지하는 사항이라고 지적했다.

필리포 그란디 유엔난민기구(UNHCR) 대표는 지난 10일 유럽의회 연설에서 EU 지도자들은 이주민 문제에 '저급한 해결책 경쟁'에 나서지 말라고 호소하면서 "법치에 기반을 둔 EU는 더 잘해야 하고, 더 잘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태에서 무책임한 외국인 혐오, 장벽과 철조망 설치, 무차별적 구타, 폭력적 송환 같은 '반사적 반응'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사람들을 강물이나 바다에 빠져 죽도록 내버려 둔 채 망명권 수용 의무를 회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EU 집행위원회는 난민 유입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난민 도착지 국가의 부담을 더는 방향으로 망명 제도를 개선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방안은 망명 신청자를 각국으로 분산하는 '공정한 메커니즘'을 마련하고 최초 도착지와는 상관없이 EU 회원국이 수용 능력에 맞춰 분산 수용하는 체제를 골자로 한다.

난민 망명권에 관한 '더블린 조약'은 유럽에 유입된 난민이 첫발을 디딘 국가에서 망명 신청 절차를 진행하도록 한다. 이에 따라 그리스와 이탈리아 등 EU 국경 난민 도착지 국가가 큰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EU는 장기적으로 난민 통제와 난민 분산 수용을 위한 강제 할당을 EU 기구로 통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망명 심사와 처분 등의 모든 권한을 EU 망명지원사무소(EASO)로 이관한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국경 장벽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155㎞에 달했던 베를린 장벽은 1989년 붕괴했다. 그러나 그 이후 유럽 국가는 베를린 장벽의 6배가 넘는 약 1천㎞의 장벽을 건설했다.

유럽 싱크탱크의 한 전문가는 EU 국경의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경 지역 난민에 적용되는 EU의 법 규정을 정비해야 한다며 "유럽이 요새화된다면 거기에는 '창문'과 '다리'가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songb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