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의 상징 웨버 美 예비역 대령 국립묘지 안장, 예포 21발 국가정상급 최고 예유  

[금요화제 / 6·25 전쟁 발발 72주년]

6·25 참전 전투중 오른팔-다리 잃어
워싱턴DC 참전 기념비 완공 등 기여
눈감는 날까지 남북 분단 안타까워해
관속에 성조기와 태극기 나란히 넣어 

한국전 참전 영웅이자 한미동맹의 상징적 인물로 꼽히는 고(故) 윌리엄 웨버 미군 예비역 대령이 6·25 전쟁 발발 72주년을 사흘 앞둔 22일 성조기와 태극기를 품에 안고 영원한 안식처를 찾았다.

지난 4월 9일 향년 97세로 별세한 웨버 대령의 안장식이 이날 오후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엄숙하게 거행됐다.

웨버 대령은 한국전에서 크게 다쳐 평생 고통을 겪었지만, 전역 후에도 동맹 강화와 참전용사 지원 사업을 활발히 벌인 한미 동맹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그가 거주하던 메릴랜드주 프레데릭을 출발한 운구 행렬은 생전 그의 바람에 따라 워싱턴DC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을 먼저 둘러본 뒤 인근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도착했다. 웨버 대령은 참전공원에 서 있는 '19인 동상'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안장식에는 부인 애널리 웨버(93) 여사를 비롯해 며느리, 손녀 등 가족과 지인 등 70여명이 참석했다. 최근 부임한 조태용 주미 대사도 자리를 함께해 유족을 위로했다.

웨버 대령은 생전 1남 1녀를 뒀지만 자녀가 모두 먼저 세상을 뜨는 아픔을 겪었다.

이날 안장식은 70명가량의 의장대가 동원될 정도로 극진한 예우 속에 진행됐다. 중간중간 군악대의 조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웨버 대령의 관은 7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실려 마지막 이별 의식이 치러지는 장소로 이동했다. 7명의 의장대는 동시에 3발씩의 예포를 쐈다. 예포 21발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한다. 안장식 시작 전만 해도 화씨 90도를 웃돌 정도로 따가운 햇볕이 비쳤지만, 의식이 끝날 무렵 웨버 대령의 영면을 슬퍼하듯 갑자기 10분가량 소나기가 쏟아졌다.

웨버 대령의 관에는 미국 국기인 성조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들어가 있다. 한국계 미군 퇴역군인 송주섭 씨가 지난 4월 22일 웨버 대령의 추도식 때 유족의 양해를 얻어 양국 국기를 관속에 넣은 것이다. 당시 추도식에는 현직이던 문재인 전 대통령과 당선인 신분이던 윤석열 대통령이 공히 조전을 보내고 국가보훈처장이 직접 참석할 정도로 한국 정부도 극진한 예를 다했다.

웨버 대령의 가족들은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면서 "한국이 민주주의 발전에서 이룬 업적을 매우 큰 영예로 생각했었다"고 회고했다.

안장식에 참석한 월터 샤프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웨버 대령이 죽는 날까지 이룬 업적을 기억해야 한다"며 "이는 한미동맹의 중요성, 한국에서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 법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기렸다. 조태용 대사는 "웨버 대령의 뜻을 기려 한미 동맹이 미래세대에도 계속 튼튼히 발전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한미동맹이 한국의 가장 중요한 외교적 자산으로 우뚝 서도록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웨버 대령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공수 낙하산부대 작전장교(대위)로 참전해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작전 등에서 활약했다. 1951년 2월 원주 북쪽 324고지에서 오른팔과 오른 다리를 잃는 큰 상처를 입었다. 미국에서 1년여의 수술과 치료를 거쳐 현역에 복귀한 뒤 1980년 전역했다. 그는 퇴역 후 불편한 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6·25전쟁 참상을 알리고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활동에 매진했다.

사설
22일 웨버 대령의 운구 행렬이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 안장식장으로 향하고 있다.
전쟁중에 오른팔을 잃은 웨버 대령이 생전에 워싱턴 기념비 앞에서 힘겹게 왼손을 올려 경례하는 모습은 큰 감동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