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측 제시 증거 합리적 의심 들지 않을 만큼 혐의 증명"

피고인 진술 일부 사실로 판단하고 '살인의 미필적 고의' 인정

(제주=연합뉴스) 백나용 기자 = 제주의 대표적인 장기 미제 사건 중 하나인 '변호사 피살사건'의 피의자가 23년 만에 유죄를 선고받았다.

광주지법 제주형사1부는 이모(당시 45세) 변호사 살해 혐의로 구속기소 된 피의자 김모(56) 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검찰은 이 사건과 관련한 공소 사실을 뒷받침할 증거로 피고인 진술과 여러 관련자의 증언 등 간접 증거밖에 없어 유죄를 입증하는 데 애를 먹었다.

항소심 과정에서도 직접 증거가 제시되지 않아 살인 혐의에 무죄가 점쳐졌지만, 예상을 뒤엎고 유죄가 선고됐다.

항소심 재판부가 1심과 달리 피고인에게 살인죄를 적용한 이유는 뭘까.

◇ 간접 증거에 대한 증명력 '주목'

항소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와 달리 검찰 측이 제시한 간접 증거가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사실이 증명됐다'고 봤다.

앞서 1심 재판부는 김씨의 살인 혐의에 직접 증거가 없고 간접 증거만으로 유죄를 인정하려면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사실이 증명돼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특히 검찰이 제시한 증거 중 상당 부분이 단지 가능성과 추정만으로 이뤄졌다고 봤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항소심 재판부는 "형사재판에서 유죄로 인정하기 위한 간접 증거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여야 하지만, 이는 모든 가능한 의심이 없어질 만큼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즉, 합리적 의심에 모든 가능한 의문과 불신까지는 포함되지 않으므로, 증명력이 있다고 인정된 증거를 의문과 불신으로 배척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김씨가 이 사건 공소시효가 만료된 줄 알고 한 방송 인터뷰 내용과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던 경찰 수사 결과가 대체로 부합한 데 주목했다.

김씨는 2020년 6월 27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인터뷰에서 "1999년 10월 당시 조직폭력 두목인 백모 씨로부터 범행 지시를 받았고, 동갑내기 손모 씨에게 교사해 실제로 범행이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당초 두목은 다리를 찔러 겁을 주라고 했지만, 자신의 말을 듣고 직접 행동에 나선 손씨가 피해자가 저항하는 과정에서 살해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때 범행에 사용된 특수 제작 흉기의 길이 등을 설명하고 직접 그려서 보여주기까지 했다.

또 과거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던 이 변호사의 이동 동선과 골목의 가로등이 꺼진 정황까지 설명했다.

이는 경찰이 수사한 내용과 부합했다.

특히 흉기 생김새의 경우 그동안 수사기관도 특정하지 못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 부검 감정 결과 피고인이 그린 흉기 생김새가 상처 내용과 매우 부합하는 등 피고인 진술이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 공소시효 끝난 줄 알고 한 말이 발목

재판부는 피고인 진술 중 일부도 사실로 봤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진술을 여러 차례 번복했으나, 여러 사정을 종합하면 피고인 진술 중 일부가 신빙성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성명불상자로부터 3천만원을 받고 피해자 가해를 사주받은 피고인이 공범인 손모 씨에게 이를 지시·의뢰했고, 손씨는 피해자 정보를 수집하고 범행을 실행함으로써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게 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러한 판단 이유로 공소시효가 완성됐다고 믿은 피고인이 금전적 목적으로 제작진에게 자발적으로 접촉해 진행된 방송 인터뷰와 방송 인터뷰 전 진행된 전화 통화 인터뷰에서 적어도 사건 경위에 대해서는 적극적이고 일관되게 이야기한 점을 들었다.

또 피고인이 과거 동거녀 등 지인에게 이 사건과 관련해 일관된 내용으로 이야기한 점, 초기 경찰 조사에서 범행을 사주한 자를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은 바뀌었으나 이외 내용에 대해서는 변함없이 설명한 점 등을 꼽았다.

실제 김씨는 자신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하자 진술을 번복하고, '이 사건에 개입한 적이 없다', '손씨의 단독 범행이다' 등의 주장을 하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수사 전까지만 해도 일관적인 주장을 펼쳤다.

항소심 재판부가 김씨 진술 중 일부를 사실로 보면서, 1심에서 고려되지 않았던 살인의 미필적 고의도 인정됐다.

미필적 고의란 범죄 결과의 발생 가능성을 예상하고도 범행을 저지른 것을 말한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공범인 손씨가 범행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흉기의 형상이나 제작 방법을 자세히 알고, 조직폭력배 조직원으로 활동하면서 다른 조직원이 흉기에 찔려 사망한 사건을 경험한 적이 있는 만큼, 손씨가 흉기로 피해자에게 상해를 가할 시 의도와 달리 피해자의 생명을 해하는 결과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식했다고 봤다.

김씨가 손씨에게 범행을 지시·의뢰했을 당시 피해자가 사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알고도 용인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공범인 손씨는 피고인의 지시·의뢰를 수락한 다음 피해자를 상대로 범행을 저질렀다"며 "이는 피고인이 이 범죄 실행 행위를 분담한 것으로 인정돼 피고인 역시 살인죄의 공동정범의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공동정범이란 2명 이상이 공동으로 죄를 범한 경우를 말한다. 공동의 계획에 따라 각자 역할을 분담해 범행을 이행한 정범(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를 스스로 행한 자)이라는 의미다.

dragon.m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