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20년 전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작성한 ‘히딩크호’를 보는 듯했다. 완벽에 가까운 수비 조직력과 승부처에서 선수들의 투혼이 만들어낸 ‘루사일의 기적’이었다.

‘중동의 자존심’ 사우디아라비아가 ‘슈퍼스타’ 리오넬 메시가 버틴 우승후보 아르헨티나를 꺾는 이변을 일으키면서 주목받고 있다. 사우디는 22일(한국시간) 카타르 루사일에 있는 루사일 스타디움에서 끝난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C조 1차전에서 아르헨티나에 2-1 역전승했다. 전반 메시에게 페널티킥 선제골을 내주고 끌려갔으나 후반 3분과 5분 각각 살레 알 셰흐리, 살렘 알도사리의 연속골로 점수를 뒤집었다.

어쩌다 걸린 ‘행운의 승리’가 아니다. 사우디는 준비한 축구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아르헨티나를 침몰시켰다. 기본적으로 조직력이 탁월했다. 사우디는 자국 리그 최강 알 힐랄 소속 선수만 월드컵 최종 명단에 12명이나 집어넣었다. 이날 선발로 뛴 11명을 보면 측면 공격수 피라스 부라이칸(알 파테흐)과 수비수 하산 탐박티(알 샤바브)를 제외하고 9명이 알 힐랄 선수였다.

알 힐랄은 한국 국가대표 출신 수비수 장현수가 몸담은 클럽으로 지난해 아시아 챔피언스리그(ACL)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다. 소속팀서부터 발을 맞춘 이들은 에르베 르나르(프랑스) 감독이 이번 대회에 승부로 내건 수비 색채는 물론, 공격 성향까지 완벽하게 표현했다.

볼 점유율은 24%에 불과했지만 사우디는 상대 공격을 저지하면서 2개의 유효 슛을 모두 득점으로 연결했다. 메시에게 초반 페널티킥 선제골을 내줬으나 흔들림 없이 오프사이드 트랩을 활용한 게 인상적이었다. 메시의 공간 침투와 전진 패스를 염두에 둔 사우디 선수들은 마치 한 몸이 돼 움직이듯 수비 간격을 90분 내내 일정하게 유지했다. 공간을 내주지 않는 것은 물론 완벽한 수비 라인 제어를 뽐냈다. 아르헨티나는 실제 전반에 두 차례 골망을 더 흔들었으나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았다. 이날 아르헨티나가 기록한 오프사이드는 무려 10개였다.

그리고 후반 초반 아르헨티나가 방심한 사이 두 골을 몰아넣었다. 특히 1-2로 맞선 후반 8분 아르헨티나 수비 2명을 제치고 오른발 감아 차기로 결승골을 터뜨린 알도사리의 득점은 ‘사우디 메시’라는 애칭에 걸맞았다. 또 후반 종반 아르헨티나 공세가 거셌을 땐 알 부라이칸 등 공격수가 측면 수비수처럼 내려와 투혼의 수비를 펼쳐 눈길을 끌었다. 경기력 뿐 아니라 간절함과 투혼 모두 사우디의 압승이었다.

이날 FIFA 스탯에 따르면 중원의 알둘레라 알말키가 11.37㎞를 뛰었고, 결승골 주인공 알도사리는 74차례 스프린트를 기록했다. 또 동점골을 터뜨린 알 셰흐리는 수비 상황에서 상대 압박에 가담한 게 78회나 됐다. 골키퍼 모하메드 알 오와이스는 14차례 선방을 펼쳤다.

2002 한일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도 비슷한 축구를 했다. 필드 플레이어 10명이 공수를 오가며 조직적인 방어망을 구축했다. 또 강력한 체력을 바탕으로 전방 압박을 펼쳐 상대 공격을 무력화했고, 득점 기회를 살려 역사적인 성과를 냈다. 사우디 축구는 그저 밀집수비로 나서는 다른 중동 팀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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