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상 아이돌’이 K팝의 새로운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등장하는 가상 걸그룹 헌트릭스가 부른 ‘골든(Golden)’이 최근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 100’에서 1위를 차지했다. K팝 곡이 해당 차트 정상을 밟은 것은 싸이의 ‘강남스타일’ 이후 13년 만이다. ‘골든’은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100’에서도 2위에 올랐다.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가 부른 노래가 세계적인 차트를 잇따라 점령한 것은 전례 없는 현상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가상 아이돌인 플레이브도 국내외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국내 주요 음원차트와 음악방송 1위를 휩쓴 데 이어, 최근에는 일본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이들의 일본 데뷔 싱글 ‘카쿠렌보’는 발매 첫날 약 19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오리콘 ‘데일리 싱글 랭킹’ 1위를 차지했다.
다만, 두 팀 모두 ‘가상 아이돌’로 불리지만 본질은 확연히 다르다. 헌트릭스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세계관 안에서만 존재한다. 팬들은 작품이 만들어낸 이야기와 캐릭터에 열광하지만, 현실에서 헌트릭스의 공연이나 방송을 직접 만날 수는 없다. 헌트릭스의 ‘골든’ 무대 역시 애니메이션 속 장면으로만 존재한다. 결국 ‘골든’의 인기는 음악 자체의 완성도와 더불어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서사가 맞물린 결과로 볼 수 있다.
반면 플레이브는 현실 세계에서 활동하는 아이돌이다. 비주얼은 버추얼 캐릭터이지만, 그 뒤에는 실제 인물이 존재한다. 팬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라이브 방송과 콘서트를 통해 교감한다. 애니메이션처럼 단순히 캐릭터를 소비하는 것과는 다르다. 일반적인 아이돌 가수와 마찬가지로, 예준, 노아, 밤비, 은호, 하민 등 멤버들과 팬들이 서로 유대감을 느끼고 교감하는 관계다. 아이돌 산업의 핵심인 팬 소통 구조를 그대로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두 팀 모두 K팝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헌트릭스는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통해 K팝의 매력을 새로운 글로벌 소비층에 전파했고, 플레이브는 첨단 기술을 활용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었다. 방식은 다르지만, ‘현실 무대’의 제약을 뛰어넘어 K팝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가상 아이돌 문화가 뿌리내린 일본에서 한국의 가상 아이돌이 괄목할 성과를 냈다는 사실은 의미가 크다. 일본은 애니메이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린 민메이가 오리콘 차트까지 진출한 것을 비롯해, 보컬로이드 대표 가수 하츠네 미쿠에 이르기까지 가상 캐릭터 기반의 음악이 주류로 자리잡은 시장이다. 헌트릭스와 플레이브의 성과는 K팝의 가상 아이돌이 원조를 넘어설 만큼 파급력을 갖췄다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향후 가상 아이돌과 인간 아이돌 간 경쟁은 더욱 본격화될 전망이다. 가수의 실존 여부가 점차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헌트릭스와 플레이브의 성공으로 인해, 새 가상 아이돌 모델이 등장해 기존 K팝 산업 구조를 뒤흔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가상 아이돌이 K팝의 다음 단계를 주도할지 이목이 쏠린다. roku@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