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 빠진 자리엔 진흙더미…예산 하포리, 기습폭우에 삶의 터전 무너져
"내 나이가 여든이야. 내가 이 냉장고를 어떻게 옮겨."
18일 오전 찾아간 충남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 마을.
전날 내린 기록적 폭우와 삽교천 제방 유실로 마을 전체가 통째로 잠긴 지 하루가 지났다.
평범했던 농촌 마을은 하룻밤 사이 진흙과 잔해로 뒤엉킨 전쟁터로 변해 있었다.
마을 진입로 곳곳은 여전히 물에 잠겨 승용차로는 들어갈 수 없는 상태였다.
차에서 내려 장화를 신고 조심조심 발을 옮겼다.
도로 위엔 무너진 담벼락 조각, 부서진 냄비, 젖은 옷가지들이 뒤엉켜 있었다.
논과 비닐하우스는 아직 물로 가득했지만, 마을은 어느 정도 물이 빠진 모습이었다.
대신 물이 빠진 자리는 악취와 파리떼가 먼저 차지했다.
임시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낸 뒤 집을 찾은 김인순(80) 씨는 대문을 열자마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고 했다.
"살림살이는 다 물에 떠내려갔고, 냄새가 진동하니, 이걸 언제 다 치워."
김씨는 허리를 짚은 채 거실을 둘러봤다.
장판은 뒤틀려서 들려 있었고, 벽에는 허리 높이까지 누런 물 자국이 뚜렷했다.
한쪽 구석엔 전기밥솥과 그릇이 뒤엉켜 흙탕물 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
기자는 말을 잇지 못했고, 김씨는 작은 한숨을 뱉은 뒤 마른 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는 "허리가 아파 아무것도 못 한다"며 "이 많은 것을 언제, 어디서부터 치워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팔십 평생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김씨의 집에서 100m가량 떨어진 이경호(72) 씨의 집은 더 심각했다.
지대가 낮아 마을에서 가장 먼저 물이 덮친 곳으로, 폭탄을 맞은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문을 열자 손주들이 타던 자전거와 유모차는 물론 전기밥솥과 이불이 뒤엉킨 채 흙탕물에 젖어 있었다.
흙탕물이 말라붙은 자국 위로 파리떼가 무리를 지었다.
마당을 지나 방문을 열자 널브러지듯 쓰러져 있는 대형 냉장고가 입구를 막고 있었다.
냉장고를 밟고 겨우 거실로 들어서자 가족사진 하나만이 벽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이씨는 전날 새벽 재난 문자를 받고 휴대전화 하나만 들고 대피했다고 했다.
"물소리가 갑자기 심해져서 무조건 뛰었지. 허리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었어."
마당에는 그동안 정성 들여 기른 고추 모종들이 진흙 속에 파묻혔고, 햇볕 잘 드는 곳에 두고 키우던 화초 화분들은 죄다 부서져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전춘자(72) 씨는 울음을 찾지 못하고 기자의 팔을 붙잡았다.
전씨는 "냉장고와 세탁기 등 모든 가전제품이 쓰러져 있다"며 "여자 혼자 사는 집도 많은데 우리가 어떻게 치우느냐"고 말했다.
하포리 마을의 침수는 기록적인 폭우와 함께 삽교천 제방이 유실된 게 결정적 원인으로 꼽힌다.
인근 마을들은 피해가 경미했지만, 하포리 마을은 무방비로 물살을 맞았다.
주민들은 마을 전체가 한순간에 물에 잠긴 게 그 증거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 "우리 마을은 모두 노인들뿐이어서 복구는커녕 당장 끼니조차 걱정해야 할 판"이라며 "우리가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와 생활할 수 있도록 예산군이든 충남도든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마을 복구는 이제 막 시작됐다.
무너져 내린 건 주민들의 하루하루였고 그들이 평생 일궈온 삶의 터전이었다.
도움의 손길이 닿기 전까지 이곳 사람들은 그저 뻘밭 위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한다.
그들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른 채 뻘 속에 잠긴 마을 한가운데서 묵묵히 서 있었다.
(예산=연합뉴스) 한종구 기자 =jkha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