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석의 동서남북

수필가, 목사

  • 인간만사 '새옹지마'

    한 농부가 큰 맘 먹고 재산의 반을 처분해서 말 한 필을 샀는데 이 말이 얼마 되지 않아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이 일이 불행한 일인지 어찌 알 수 있겠소"하면서 이를 태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얼마 후에 도망갔던 말이 값비싼 종마를 데리고 돌아오자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서 한마디씩 했습니다. "복이 넝쿨째 들어왔네요." 농부는 "이 일이 복인지 어찌 알겠소"하면서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며칠 후 종마를 길들이던 아들이 말의 뒷발에 차여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다시 위로를 했지만 농부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그 후 전쟁이 일어나자 건장한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끌려갔으나 다친 아들은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눈앞에 찾아온 불행으로 인해서 인생의 끝이라도 경험한 것처럼 생각하며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자신에게 찾아 온 행운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자만하는 사람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일어난 일의 끝을 알 수 없기에 행과 불행을 따라서 안주할 이유가 없습니다. 삶의 과정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화가 변화여 복이 될 수 있습니다. 당장 보기에는 어렵고 힘들 것 같은 일도 나중에는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사 성어 가운데 인간만사 새옹지마 (人間萬事 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새옹지마와 같으니 눈앞에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 너무 연연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슬픈 일도 기쁜 일도 그 자체만으로 얘기할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삶에 찾아오는 행운에 대해서 교만하지 않고 불행을 보면서 낙심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이나 슬픔도 삶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길에 나타나는 모든 일이 창조주의 뜻 안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당신은 준비돼 있습니까?"

    미국에 와서 접하는 문화적인 차이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묘지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묘지라기보다 공원처럼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묻혀있는 그곳에 가서 책을 읽거나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묘지를 돌면서 묘비에 적힌 글을 읽었습니다. 어느 묘지 앞에 한참을 서 있는데 묘비에 적혀있는 글이 너무나도 흥미로웠다고 합니다. 묘비에는 세 줄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소" 그는 그 첫번째 글을 접하는 순간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그 다음의 글은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웃고 있었소"라고 써있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웃음을 멈춘 채 다음 줄에 적힌 글을 조심스럽게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음에 대해 준비를 하시오" 이 글을 읽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진정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답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이는 인류 역사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품어왔을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을 접하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좀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처럼 힘쓰고 애쓰는 일들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냐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죽음이라는 고지를 향해서 한걸음씩 나가고 있습니다. 조금은 언짢게 들릴지 몰라도 각자의 죽음을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당신은 죽음의 날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 한번 묻고 싶습니다.


  • '무자식 상팔자'의 함정

    한국에서 여성 한 명이 출산하는 자녀수는 2005년 말 기준으로 1.08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OECD 국가는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에 해당합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현재의 인구를 유지하려면 출산율이 적어도 2명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어떤 특단의 조치와 자녀출산에 대한 획기적인 의식의 변화가 없이는 인구감소 국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어쩌다 우리가 인구감소를 걱정할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여성들의 의식변화에서 주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자녀를 갖는 것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관이 편의주의를 좇아서 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결혼한 여성들 가운데 자녀를 갖는 것을 짐이나 부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특별히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자녀 갖기를 꺼린다는 것입니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얘기도 있지만 상팔자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자녀가 없는 인생을 선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대단히 위험천만한 것으로서 결혼한 사람으로서 자녀를 갖지 않는 것이 인생의 취향이 되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아이를 낳거나 낳지 않는 것이 짜장면이나 짬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듯 취사선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자녀는 분명 가정의 기업인데 결혼을 하고도 자녀를 갖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정에 주시는 축복과 관계없이 살아보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네 명 중에 하나가 기독교인이라는 한국에서 저 출산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이기적인 편의를 쫓아서 자녀 갖기를 포기한 여성들마다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정과 자녀에 대한 참된 가치관을 회복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 목사의 '배신'

    말세라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별 이상한 일들이 다 발생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13세 미성년자인 딸을 마구 때려서 숨지게 하고 미라가 될 때까지 집에 시신을 방치해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세간에 더욱 큰 공분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가해자가 목사의 신분이었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쉬운 얘기로 명색이 목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와 같이 천인공노할 일을 저지를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다루면서 '그는 목사가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라는 신문 제목을 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누구든지 한마디씩 할 수 있는 가십거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도대체 대명천지에 목사의 탈을 쓰고 어떻게 이렇게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사건을 접할 때마다 두렵고 고통스런 심정이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세간에 보지만 그렇지 않아도 목사를 비롯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한 평판이 바닥을 헤매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텐데 이웃에 덕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그져 안타까움만 더할 뿐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건의 가해자도 목사 이전에 죄 많은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소정의 훈련과 절차를 따라서 목사의 직분을 받았을지라도 여전히 죄성을 타고난 상처받은 영혼이라는 말입니다. 목사라는 직분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크면 클수록 이를 배신하는 자에 대한 분노도 더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번 사건의 가해자는 이러한 공공의 기대를 철저히 저버린 배신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중에도 그분을 팔아먹은 배신자가 있었듯이 목사라는 직분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주님이 선택하신 직분자들은 어떠한 핍박과 어려움에도 그분은 물론 사람들을 배신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 무자식 상팔자?

    한국에서 여성 한 명이 출산하는 자녀수는 2005년 말 기준으로 1.08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OECD 국가는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에 해당합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현재의 인구를 유지하려면 출산율이 적어도 2명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어떤 특단의 조치와 자녀출산에 대한 획기적인 의식의 변화가 없이는 인구감소 국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어쩌다 우리가 인구감소를 걱정할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여성들의 의식변화에서 주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자녀를 갖는 것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관이 편의주의를 좇아서 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결혼한 여성들 가운데 자녀를 갖는 것을 짐이나 부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특별히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자녀 갖기를 꺼린다는 것입니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얘기도 있지만 상팔자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자녀가 없는 인생을 선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대단히 위험천만한 것으로서 결혼한 사람으로서 자녀를 갖지 않는 것이 인생의 취향이 되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아이를 낳거나 낳지 않는 것이 짜장면이나 짬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듯 취사선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자녀는 분명 가정의 기업인데 결혼을 하고도 자녀를 갖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정에 주시는 축복과 관계없이 살아보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네 명 중에 하나가 기독교인이라는 한국에서 저 출산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이기적인 편의를 쫓아서 자녀 갖기를 포기한 여성들마다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정과 자녀에 대한 참된 가치관을 회복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 "족하리만큼 먹으라"

    얼마 전 주치의를 찾았다가 건강을 지키는데 유익한 식사습관에 대한 몇 가지 상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치의의 지론은 밥을 주식으로 하는 경우에 밥의 양을 줄이는 것과 식사를 할 때 최대한 천천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허기가 지면 본의 아니게 식사를 많이 하기도 하고 시간에 쫓기는 가운데 서둘러서 식사를 마쳐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식습관이 성인병을 일으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 하니 마음 중심에 새겨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모임에 나가서 여러 사람이 같이 어울려서 식사를 하다보면 과식할 때가 많습니다. 식욕의 종이 되지 않도록 때로는 금식이나 절식도 하지만 음식을 탐하는 욕구를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적당히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음식을 보면 쉽게 절제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지혜서로 통하는 성경 잠언서는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아무리 산해진미로 가득하다 할지라도 몸에 무리가 되지 않도록 과식하지 말라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충분한 칼로리를 섭취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음식물을 섭취할 때 심장에 과중한 짐이 될 수 있습니다. 몸속에 가장 쌓이기 쉬운 것이 당과 콜레스테롤인데 이것들은 없어도 문제이지만 많이 있으면 모든 성인병의 근원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필요 이상으로 과식하는 것이야말로 만병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보면 쉽게 절제하지 못하는 것도 삶을 힘들게 만드는 나쁜 습관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번 건강을 잃게 되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육신의 건강을 보전하기 위해서 과식하는 식습관을 피하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 말 한마디에…

    언어는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한 살이 되면 다섯 단어를 익히고 두 살 때는 260단어를 배우며 다섯 살 때에는 약 2000단어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성인이 되었을 때 하루에 쓰는 단어가 남자는 평균 2만 오천이고 여성의 경우는 이보다 더 많은 3만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일 년 동안 사용한 단어로 책을 펴내면 400페이지에 달하는 책 132권을 만들 수 있습니다. 평생 이야기하는 시간만을 따로 모을 때 약 13년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본국의 MBC 방송에서 한글날을 맞이하여 언어에 대한 특별 프로그램을 방영한 일이 있습니다. 햅쌀로 지은 밥을 유리병에 담아 두고 하나의 병에는 '고맙습니다'라는 종이를 붙이고 다른 병에는 '짜증나'라는 종이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4주 동안 '고맙습니다'로 이름 한 병에는 매일 고운 말을 하도록 했고 '짜증나'로 정한 병에는 욕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병들의 뚜껑을 열었더니 신기하게도 '고맙습니다'에서는 하얀 곰팡이가 구수한 냄새를 피우는 반면에 '짜증나'에서는 거무스름한 곰팡이가 심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상 사용하는 말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충분히 실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성경의 지혜서 가운데 하나인 잠언에 보면 많은 곳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교훈합니다. 사람들이 일상 사용하는 언의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 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 하느니라"언어는 이처럼 잘 활용할 수 있을 때 능력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남을 해치는 무기로 둔갑할 수 있습니다. 3만 단어 가까이 사용하는 하루의 언어 가운데 과연 얼마나 자신과 이웃에게 유익이 되고 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 'S=X+Y+Z'

    아인슈타인은 특별히 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언젠가 아인슈타인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여 학문에서 성공을 거두셨나요?"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칠판에 'S=X+Y+Z'라고 쓴 다음 그들에게 부연 설명을 했습니다. “S는 성공입니다. 그리고 K는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것이고 Y는 지금 현재의 생활을 즐기라는 것이며 Z는 한가한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 성공의 비결입니다.” 우리가 말을 많이 하다보면 필요 없는 말이 나오기 마련이고 그만큼 실수도 많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말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하는 것은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풍요로운 인생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재를 최고의 기회로 여기고 즐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앞으로 찾아올 현재의 시간이 즐겁게 되고 만족한 미래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삶에 여유를 찾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여유가 없으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함으로서 삶이 윤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과 같이 성공적인 인생을 이루기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삶에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너무 지치고 피곤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00m 단거리 경주를 하듯이 기진맥진하는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휴식을 찾는 것은 결코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 아닙니다. 여름날 나무 아래서 잔디에 누워보고 물의 속삭임을 듣기도 하며 하늘 위를 가로질러 떠다니는 구름을 쳐다보는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성공이라는 별을 따기 위하여 힘겹게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이제는 여유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단 한 순간도 여유라는 것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세상 가운데 이러한 허상을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내안에 있는 파랑새를 찾아볼 수 있기를 권면합니다.


  • 목사의 학위

    목사는 세상에서 생각하는 직업의 하나로 볼 수 없는 직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 받아서 그분이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도록 되어있는 성직(聖職)입니다. 목사가 되기를 원한다고 해서 아무나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 되어서도 안될 일입니다. 세상에서 보듯이 어떤 조건이나 자격을 갖추었다고 목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전혀 아닌 것 같은 사람이 훌륭한 목회자로 쓰임을 받는가 하면 그와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회자의 자화상에 걸맞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목사의 학위를 꼽을 수 있는데 목사의 학위가 철저히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고 있습니다. 학위가 목회에 있어서 얼마나 필요한지는 몰라도 학위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적지 않은 목사들이 엉터리 같은 학위라도 받아야 하겠다는 어떤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깊어지다 보면 가짜학위에 대한 유혹까지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목사에게 학위가 얼마나 중요하기에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면서까지 받아야 하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문에 대한 소양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한다면 누구든지 웬만한 학위쯤은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노력을 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반드시 목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지 않으셔도 학위는 얼마든지 받을 수 있지만 그분이 부르지 않으면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박사보다 못한 목사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봅니다. 세상이 박사를 더 알아준다 해서 스스로 목사보다 박사라는 호칭에 더 관심을 가져서는 안될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목사로 부르실 때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기에 부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도 박사학위가 목사보다 더 매력이 있다면 목사의 직분을 반납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 역전의 삶을 기대하며

    연말을 맞이하면서 여기저기서 우울한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 언론기관에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 살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6.3%만이 긍정을 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일을 해도 잘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노동자가 무려 66%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결국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의욕을 상실한 가운데 삶에 대해서 비관적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어려운 현실보다도 사람들이 더 심하게 어려움을 타는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2월이 되면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우울증이 다른 달에 비해서 훨씬 더하게 된다 합니다. 1년 동안에 이루기를 기대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한 상실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바라는 것은 많았는데 되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연말을 맞이하면서 망년회를 즐기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한해의 삶을 훌훌 털어내기 원하는 그들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망년회를 통해서 한해를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어두운 사건들을 잊고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힘들었던 지난날을 잊어버리는 것으로 이러한 삶의 흔적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어두운 기억을 반전시킬 수 있는 역전의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아무리 죽을 쑨 경기라도 9회 말 역전타 한방으로 얼마든지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경기를 하다보면 상대 투수에게 계속해서 삼진을 당하거나 병살타를 칠 수도 있습니다. 수비를 하는 중에 실책을 범해서 상대편에게 뼈아픈 점수를 주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9회 말 공격 때 통쾌한 역전타 한방이면 이 모두를 일시에 날려버리게 됩니다. 금년 한해 경험할 수 있었던 어떠한 우울한 소식도 이 성탄의 계절에 성탄의 기쁨을 통해서 통쾌하게 역전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