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공동성명 명시 '행동 대 행동' 해법 염두 가능성
美 선호 '일괄타결식 리비아 해법'과 충돌 가능성

(서울=연합뉴스) 조준형 기자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5∼28일 방중 기간에 선대의 유훈을 거론하면서 "한반도 비핵화 실현에 주력하는 것은 우리의 시종 일관된 입장"이라고 말했다고 중국 매체들이 28일 보도함에 따라 구체적인 언급 내용이 주목된다.

김 위원장이 이번 방중을 통해 핵 관련 언급을 내놓으면서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에서의 핵문제 담판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먼저 카드를 던진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한반도 비핵화가 선대의 유훈이라는 점은 이달 초 방북한 우리 대북특사단에도 김 위원장이 밝힌 내용이다. 남측 특사들에게 거론한 비핵화 용의를 중국에 가서 국제사회에 재확인한 셈이다.

이번 방중 기간에 김 위원장은 한 발짝 더 나아가 "한미가 선의로 우리의 노력에 응해 평화 안정의 분위기를 조성해 평화 실현을 위한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조치를 한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한 것으로 중국 매체들은 전했다.

'평화 실현을 위한 단계적이고 동시적 조치'를 거론한 것은 김 위원장이 생각하는 비핵화 협상에 대한 나름의 '원칙'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곧 과거 북핵 6자회담 과정에서 견지된 원칙인 '행동 대 행동'에 입각한 '단계적 방식'의 비핵화 프로세스를 강조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북한 비핵화의 '대헌장' 격인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에도 "6자는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 원칙에 입각하여 단계적 방식으로 상기 합의의 이행을 위해 상호 조율된 조치를 취할 것을 합의했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상호 신뢰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핵시설 동결-불능화-폐기 등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비핵화 과정과 북미·북일 관계정상화와 대북 경제지원 등 나머지 5개국의 상응 조치를 시계열적으로 합의한 뒤 '행동 대 행동'으로 이행해 나가자는 취지였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28일 "북한 입장에서 보면 미국이 자신들에게 제공해야 할 체제안전 보장 관련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체제 안전보장과 군사적 위협 해소의 실현에 맞춰 비핵화를 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라며 "북미정상회담에 앞서 명확한 자기 입장을 밝힌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 연구위원은 "비핵화 조치와 체제안전보장 조치를 '행동 대 행동' 원칙 하에 상호 조율된 방식으로 하자는 취지로 보인다"며 "비핵화 최종단계에서 (대북)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과정에서 압박과 군사적 위협이 없어져야 한다는 점을 에둘러서 밝힌 것 같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비핵화 단계를 여러 개로 쪼개서 합의하고 이행하는 과거에 자주 사용했던 이른바 '살라미 전술'을 고수하고 있다는 견해도 나온다.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 출신인 위성락 전 러시아 주재 대사는 "북측은 과거에도 '마지막 단계에 가서는 핵무기를 내 놓겠지만 미국이 초강대국으로서 위협적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핵을 내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 하에 단계를 잘게 나눠 이행을 하려 했다"며 "지금도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위 전 대사는 "미국의 소위 '대북 적대시 정책'이 완전히 청산되면 비핵화도 끝날 수 있지만 그에 도달하기 전에는 단계를 많이 만들고 핵무기를 끝까지 가지고 있으려는 것이 북한의 생각 같다"며 "과거처럼 9·19공동성명이라는 원론적 합의를 하고 이행은 2·13합의와 10·3합의와 같이 '슬라이스' 식으로 쪼개서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북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행동 대 행동'의 '단계적 해법'에 동의할지는 미지수라는 전망이 나온다.

신범철 국립외교원 교수는 "김 위원장이 생각하는 방식은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보이는 '일괄타결' 방식과 '리비아 해법'(핵무기 등의 해외반출과 같은 결정적 조치를 조기에 이행토록 하는 방식)을 거부하는 의미로 볼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jhc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