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세 프랑스 참전용사 세르주 아르샹보씨 “먼저 세상 떠난 전우들과 함께 영면 소원”

올해는 1953년 7월 27일 맺어진 6·25 전쟁 정전협정이 70주년을 맞는 해다. 한국전 당시 미국을 포함해 전세계 22개국 196만명의 젊은이들이 유엔의 깃발아래 참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이들이 피흘려 싸우며 지켜낸 동맹의 가치와 정신이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룬 토양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특파원들이 각국 참전용사들을 직접 찾아가 생생한 전투 기억과 소회를 들어보고 발전한 한국을 바라보는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연합뉴스의 기획 리포트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특별기획/‘숨은 영웅’93세]

철의 삼각지대·티본 전투 죽을 고비 여러번
진지 빼앗고 뺏기기 7번 반복 끝에 승리하기도
1995년 전쟁후 첫 방문 韓 달라진 모습에 감격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 말로 설명 잘 안돼”

거동이 불편한 프랑스 참전용사 세르주 아르샹보(93) 씨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인터뷰를 위해 찾아온 기자를 아파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딛는 아르샹보 씨의 뒤를 따라 집 안에 들어서니 그의 인도차이나 전쟁과 한국 전쟁 참전 사실을 알려주는 훈장과 메달, 증서들이 벽에 빼곡히 걸려있었다.

지난해 9월부터 건강이 나빠져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수술을 받은 아르샹보 씨는 질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인터뷰를 승낙한 이유를 먼저 들려주고 싶다"며 말문을 열었다.

"한국은 나에게 제2의 조국이야. 한국 정부와 한국 사람들이 나 같은 참전용사들에게 해주는 보훈은 프랑스가 해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고.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거야."

수술을 받고 나서는 음식을 씹는 게 어려워 유동식만 먹고 있다는 아르샹보 씨는 체력적으로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인터뷰를 거절할 법도 했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18세때 유엔군 소속으로 참전

아르샹보 씨는 1951∼1952년 이등병으로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철의 삼각지대 전투와 중공군의 맹렬한 공격에 맞선 티본 고지 전투에 참전한 전직 군인이다.

부모의 이혼으로 어린 나이에 외조모댁, 아동보호시설, 친조모댁 등을 전전하던 그를 전쟁터로 이끈 것은 지독한 가난이었다. 농가에서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다 입대를 택했다.

지방에 살다 무작정 파리로 올라온 그는 변변한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배가 고파 빵집에서 빵을 훔쳐 먹기도 했다. 그렇게 18세 소년은 공수부대원으로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인도차이나에서는 1년 반 뒤 말라리아에 걸렸다. 6개월 동안 야전병원에서 치료받았지만, 체중이 48㎏으로 줄었고, 생사의 경계를 오가기도 했다. 결국 치료를 받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가 수송선을 타고 본국으로 돌아오던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직업 군인을 꿈꿨던 아르샹보 씨는 병세를 회복하고 나서 다시 참전을 결심했고, 이번에는 한국으로 향했다.

▶3일간 잠 못자며 300명 전사자 수습

아르샹보 씨가 한국에 도착한 1951년 10월은 전투의 강도는 약해졌지만 철원과 김화, 북한의 평강을 잇는 중부 전선 요지,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를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때였다.

유엔군 일원으로 미 제2사단 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대대 2진은 1952년 초 철의 삼각지대에 주둔하다가 그해 7월 철원 서쪽 최전방 방어선인 티본 지구로 옮겨 싸움을 이어갔다.

아르샹보 씨는 티본에서의 전투가 가장 참혹했다고 회상했다. 1952년 7월 티본 지구의 진지를 적군에게 빼앗고 뺏기기를 일곱번 반복한 끝에 프랑스 대대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300명이 넘는 전사자가 나와 시신을 수습하고, 매장하느라 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들지 못했다는 게 가장 끔찍한 기억이라고 아르샹보 씨는 설명했다.

"그때 중공군 참호가 100m 전방에 있었어. 하루에 두 번씩 중공군이 폭격했다고. 포탄이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니 가만히 숨죽이고 있어야 할 때가 가장 무력하고 힘들었지."

포탄에 맞거나, 지뢰를 밟은 수많은 전우를 떠나보낸 아르샹보 씨는 한국전쟁 기간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자칫 잘못됐으면 생을 마감했을 뻔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한 번은 어딘가로 사라진 동료를 대신해 보초를 서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잠시 후 그 동료가 돌아와 그 자리를 내주고 나니 그곳에 포탄이 떨어져 극적으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적군 기지에 일종의 확성기를 설치하러 가다가 적발돼 포탄 세례를 맞은 적도 있고, 나무 사이에 설치된 줄에 발이 걸려 넘어져 수류탄을 밟았지만 낡아서 터지지 않은 적도 있다.

그렇게 아르샹보 씨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은 도처에 있었다. 죽음이 겁난 적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순간에 몰입하면 그런 걱정할 겨를 따위는 바로 사라졌다고 한다.

1년의 임무를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온 아르샹보 씨는 프랑스대대 3진으로 다시 한국에 갈 계획이었으나, 지금은 사별한 첫 번째 아내를 만나 전역을 하고 프랑스에 남았다.

▶한국 정부의 마스크 선물 감동

이후 빵 배달원, 운전사, 공사 현장 막노동 다양한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느라 끊긴 한국과의 인연은 1980년대 프랑스 한국전쟁 참전용사 협회의 존재를 알고 가입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참전용사 협회에 이름을 올리고 나서부터는 한국 정부에서 정기적으로 보훈을 해줘 고마운 마음이라며, 특히 코로나19 대유행 초기 마스크를 보내줘 큰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다.

국가보훈처 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 한국을 한 차례 방문했던 아르샹보 씨는 망가진 초가집뿐이던 한국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해 있어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고 떠올렸다.

아르샹보 씨는 먼저 작고한 전우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이들처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영원히 잠들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첫 번째 아내와 사이에서 태어난 딸, 여생을 함께하고 있는 두 번째 아내 모두 프랑스에 있는데도 한국에서 영면에 들고 싶다는 그의 소원에서는 한국을 향한 각별한 애정이 묻어났다.

이유가 무엇일까. 아르샹보 씨는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이같이 답했다. "글쎄 모르겠어, 말로는 잘 설명이 안 되네. 한국은 나의 특별한 두 번째 조국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