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숨은 영웅’

獨 참전용사 마이어 부부... 휴전후 부산 적십자병원서 간호사-치과기공사로 만나 '백년가약'


올해는 1953년 7월 27일 맺어진 6·25 전쟁 정전협정이 70주년을 맞는 해다. 한국전 당시 미국을 포함해 전세계 22개국 196만명의 젊은이들이 유엔의 깃발아래 참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이들이 피흘려 싸우며 지켜낸 동맹의 가치와 정신이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룬 토양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특파원들이 각국 참전용사들을 직접 찾아가 생생한 전투 기억과 소회를 들어보고 발전한 한국을 바라보는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연합뉴스의 기획 리포트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韓과의 인연에 '코레아 마이어'로 불려
남편은 1986년, 부인은 2011년 각각 별세
정부, 2018년 獨의료진 참전용사로 인정
딸·손녀, 정부 초청 “감동의 한국 방문”

"저는 기꺼이 한국에 갑니다. 전쟁으로 인해 가난해지고, 아프게 된 사람들은 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휴전 협정이 맺어지고 이듬해인 1954년 2월 독일(당시 서독) 의료지원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파견된 '백의의 천사' 고(故) 헤드비히 에버트씨가 한국 파견에 앞서 독일 지역신문에 한 말이다. 헤드비히는 "그곳에 가지각색의 궁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 정부는 2018년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부산에 적십자병원을 설립해 의료지원 활동을 펼친 독일을 '6.25 전쟁 의료지원국(참전국)'으로 추가 지정하고, 당시 한국에 파견됐던 117명의 독일 의료진 등 의료지원단원을 참전용사로 인정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 적십자 소속 간호사가 된 헤드비히는 전쟁 이후 참상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기에 선뜻 9천km나 떨어진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나라 한국에 가서 사람들을 돕기로 한 것이다.

▶비행기 7번 갈아타고 한국행

지금은 독일에서 한국까지 12시간만 비행하면 도착하지만, 당시에만 하더라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스위스 제네바, 이탈리아 로마, 이집트 카이로, 파키스탄 카라치와 태국 방콕을 거쳐 일본 오키나와와 도쿄를 거쳐 부산까지 비행기를 7번 갈아타야 했다. 가는 데만 일주일이 걸릴 정도로 머나먼 길이었다. 이런 까닭에 헤드비히의 한국행은 지역신문에까지 보도됐다.

폐허가 된 부산에 독일측이 차린 적십자 병원에서 그를 비롯해 독일(당시 서독)에서 파견된 간호사 등 의료지원단은 이후 5년간 영양실조, 기생충, 화상 등으로 고통받던 25만여명을 치료하는 한편 1만5천건의 수술을 통해 귀중한 목숨을 살려냈다.

이들 덕에 6천여명의 아기가 무사히 세상에 태어나기도 했다. 독일이 미국의 요청에 따라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결의한 해외 지원사업인 부산 적십자 병원에는 내과와 외과, 산부인과, 응급의료과, 치과, 방사선실, 실험실, 약국 등이 설치됐다.

한국인들을 치료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던 헤드비히는 부산에서 같은 의료지원단 소속 치과기공사였던 후베르트 마이어를 만났다. 키가 1.94m의 장신이었던 후베르트는 어디서건 눈에 띄었다. 아이들에게 줄 과자를 항상 갖고 다녀 병원 밖에만 나서면 아이들이 쫓아다니던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

일과 후에도 같은 의료지원단 동료들과 함께했던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고, 금방 서로 가까워졌다.

▶“한국 없었다면 우리도 없었다”

거의 날마다 고향의 부모님에게 쓴 헤드비히의 편지엔 온통 후베르트 얘기 뿐이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겼는데, 사투리를 쓰는 남독일 지방 사람이며, 종교는 천주교라는 식의 내용이었다.

두 사람은 1년여의 파견 기간을 마치고 돌아갈 때쯤 한국에서 약혼반지를 맞췄고, 후베르트는 헤드비히의 부모님에게 결혼을 승낙해달라는 편지를 썼다.

1955년 독일로 귀국한 두 사람은 이듬해 봄 결혼식을 올렸고, 곧 외동딸 자비네(64)가 태어났다.

후베르트 고향에 가정을 꾸리고, 독일 적십자 내에서 직종을 변경해 퇴직할 때까지 구급차를 운전하는 응급구조사를 했다. 반경 30km가 되는 동네에 구급차는 한 대뿐이어서 동네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후베르트가 반드시 출동해야 했다. 그의 목표는 그 어떤 경우에라도 아픈 환자를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파견됐던 경력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의 별명은 '코레아-마이어'였다.

후베르트는 1989년 다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헤드비히는 2011년 남편의 뒤를 따랐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후베르트와 헤드비히의 외동딸 자비네 바흐모어와 손녀 율리아, 손자 요하네스는 "한국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도 없겠죠"라고 말했다. 이들은 현재도 후베르트와 헤드비히가 처음 둥지를 튼 옥센하우젠 인근에 산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1989년 태어난 손자 요하네스는 "동네에 돌아다닐 때 코레아 마이어의 손자라고 하면 다들 안다"면서 "일부 사람들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만났다는 얘기를 듣고 무릎을 치며 왜 마이어 앞에 코레아가 붙었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고 말했다.

▶“새삼 뭉클한 가족의 역사”

자비네와 딸 율리아는 지난해 11월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가족의 역사가 시작된 한국을 방문했다.

자비네는 "아버지에게는 한국에 다녀온게 아주 특별한 일이었다. 자주 그 시절에 대해 얘기했고, 동네 사람들에게 슬라이드를 보여주면서 강연도 했다"면서 "어머니는 결혼후에는 가정에 전념했지만, 항상 통이 크고 너그러워서 아이들이 즐겨 놀러갔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갈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는데, 율리아와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니 부모님이 이 소식을 들으셨다면 하는 생각에 가슴이 메였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율리아는 "다른 참전용사 후손 가족들과 함께한 한국 방문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다"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만났고, 한국전쟁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 가족의 역사를 돌아보고 더 잘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