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J "20년 뒤처진 거대 단일 프로젝트 의존 방식 벗어나야"
"고객 대하듯 국민 대하는 공공 서비스 의식 전환 필요"

(서울=연합뉴스) 김현재 기자 = 동유럽 발트 해 연안의 에스토니아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보다 먼저 주민번호를 받는다.

투표, 전자 서명, 세금 납부, 은행 거래 등 에스토니아인의 생활 대부분은 이 주민번호 하나로 해결된다.

편리하면서 효율적이고 투명한 전자 정부가 구현되면서 과거 소비에트 공화국의 일원이자 인구 130만 명의 에스토니아는 IT 강소국으로 거듭났다. 에스토니아에서 세금 납부는 3분이면 끝나고 기업 설립도 10분이면 족하다.

세계 최대 인터넷 전화 업체인 스카이프(Skype), 세계 최대 개인 간 해외 송금업체인 트랜스퍼와이즈(TransferWise) 등 스타트업들이 이곳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에스토니아의 e- 정부 시스템이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9일 "미국은 에스토니아처럼 통일된 국가 ID 시스템을 도입하기는 어렵다"면서 "하지만 현대 국가의 경쟁력 요소 가운데 하나인 정부 서비스 기능의 혁신은 에스토니아를 본받아야 한다"고 보도했다.

닐 클라이먼 뉴욕대 교수는 "미국인들은 세금을 내거나 운전면허증을 재발급받는 등의 정부 서비스를 옐프에서 좋은 레스토랑을 찾거나 알파벳 구글에서 일거리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쉽고 빠르게 처리되길 원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미국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인 케빈 매카시의 수석 보좌관인 매트 리라는 "정부의 정보기술과 민간 분야의 정보기술 간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민간 분야의 각종 서비스가 효율성과 속도 면에서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데 반해 정부의 공공 서비스 기능은 아직도 아날로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회계감사원은 지난해 연방정부의 738개 주요 IT 투자 가운데 약 25%가 심각한 지연 또는 비용 초과로 위험에 빠져 있다고 추정했다. 이들 사업에 드는 예산은 420억 달러에 달한다.

WSJ는 이런 상황이 초래된 이유를 정부가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제안 계획서를 토대로한 거대한 단일 프로젝트에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소프트웨어 접근방식은 이 분야에서 최소한 20년은 뒤떨어진 시대착오적 행태라는 것이다.

최근의 IT 개발은 분절화된 작은 덩어리들을 효과적으로 진행해 문제점을 빠르게 파악하고 수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미국 정부의 'e-정부' 프로젝트는 그와는 정반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WSJ는 지적했다.

오바마 행정부도 이런 문제점을 파악하고 2년 전 '18F'로 알려진 태스크포스 구성에 착수했다. 구글, 아마존닷컴, 마이크로소프트 등에서 유능한 엔지니어와 프로젝트 매니저들을 뽑아 기존 e-정부 추진기구인 미국 디지털 서비스를 혁신시킨다는 계획이다.

18F의 아론 스노 사무국장은 "정부 서비스의 변화는 이 서비스를 만들어온 관행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데서 출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18F는 캘리포니아 아동복지 사업에 관여했다. 당초 100페이지가 넘는 제안 계획서에 토대한 이 프로젝트는 주 정부와 연방 보건당국이 협력해 2만 명의 사회복지종사자들이 연간 50만 건에 달하는 아동학대 관련 케이스를 추적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18F의 개입으로 이들 분야는 8건의 소규모 사업으로 나뉘었고, 더 기민하고 예산이 덜 드는 방식으로 재편됐다.

WSJ는 "미국 연방정부가 에스토니아처럼 기민할 수는 없겠지만, 시 단위의 지방자치단체는 충분히 가능하다"면서 최근 보스턴시의 e-정부 서비스 도입 사례를 소개했다.

마티 월시 보스턴 시장의 집무실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는 10여 개의 주민 건강 관련 현황지표가 실시간 나타나고 특정 서비스가 설정된 목표치에 미달할 경우 적신호가 켜진다. 예를 들어 응급진료 반응 시간에 대한 지표가 붉은색으로 변하면 응급환자 대처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왜 그렇게 됐는지를 분석한 보스턴시 당국은 앰뷸런스 부족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10대의 앰뷸런스를 추가 구매하기도 했다.

WSJ는 "모든 공공분야 개혁의 뿌리에는 민간 분야에서 영감을 받은 서비스에 대한 의식 전환이 자리하고 있었다"면서 "고객을 기쁘게 하려고 신제품을 개발한다는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국민을 기쁘게 만들려는 공직자들의 마음가짐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kn0209@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