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고위당국자들 잇따라 '중간단계' 필요 언급해 주목

대선 앞둔 외교적 제스처…'비핵화 최종목표'는 불변

(서울=연합뉴스) 이우탁 기자 = "궁극적인 비핵화로 향하는 중간 단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정 박 미국 국무부 대북고위관리가 5일(현지시간) 워싱턴DC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 한 말이다. 그는 "그것(비핵화)은 하룻밤에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이라고도 했다.

그의 발언은 4일 미라 랩-후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보좌관이 말한 것과 맥락이 거의 같다.

랩-후퍼 보좌관은 '중앙일보-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포럼 2024' 특별대담에서 "미국의 목표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면서도 "그러나 만약 전 세계 지역을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면 비핵화를 향한 중간 단계도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빅터 차 차 CSIS 수석부소장이 북한이 '핵보유국'인 만큼 비핵화 대신 위협 감소, 군축 등을 시도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있다고 언급한데 대한 대답이었다.

백악관 고위 당국자가 직접 '중간단계'라는 언급을 하면서 외교가의 관심이 집중된 와중에 정 박 대북고위관리가 이를 재확인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고위당국자들이 언급한 중간단계를 놓고 다양한 분석을 하고 있다. 일단 갈수록 고도화되고 노골화되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상황을 관리하거나 위협 감소를 위한 외교적 대응이라는 데는 의견이 모인다.

실제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021년 취임 직후 대북 정책과 관련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전제하면서도 '잘 조율된 실용적 접근'과 단계적 접근을 모색하겠다는 대북 정책을 내놓은 적이 있다.

이후 미국 정부는 뉴욕 채널 등을 통해 북한에 외교적 해법 모색을 제안했으나, 북한이 호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강행하거나 2022년 9월에는 '핵 선제사용'이 가능하도록 한 '핵 무력 법제화를 거쳐 지난해 9월에는 '핵무기 발전의 고도화'를 헌법에 명기했다.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상황이어서 과거의 사례를 비교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1차 북핵 위기 당시 미국은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동결을 이끌어 낸 적이 있다.

당시 북한은 경수로 건설과 중유 지원을 대가로 영변 핵시설의 동결과 해체에 동의했었지만, 2002년 'HEU(고농축우라늄) 파동' 이후 불거진 제2차 북핵 위기의 발발로 제네바 합의 이행은 중단됐다.

또 지난 2005년 북핵 6자회담에서 채택한 '9·19 공동성명'에서도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하기로 약속하고, 이후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후속 합의인 2007년 '2·13합의'에서 중간단계의 핵동결 조치에 동의했지만 결국 이행되지 않았다.

오는 11월 미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다시금 중간단계라는 외교적 공간을 제시한 만큼 외교적 시의성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만일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를 그대로 두면서도 '잠정적인 핵동결' 또는 '핵무기 감축' 등을 중간단계의 내용으로 마련해뒀다면 이는 현재의 교착 국면에서 새로운 변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미 대선의 향배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북한이 호응할 가능성이 적다는 관측이 많다. 또 이미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 북한에 중간단계라는 공간을 제공해 북한의 '사실상 핵보유국' 지위만 확인시켜줄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심상치 않게 전개되는 일본과 북한의 외교적 소통의 흐름을 감안할 때 북한이 의미 있는 반응을 보일 가능성도 있다는 시각도 상존한다.

미 대선이라는 대형변수 앞에서 한반도 정세의 미묘한 변화가 진행되는 형국이다.

lwt@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