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미사일 능력 고도화에 제재 내성도 키워…달라진 위상에 대화 문턱 높여
'美와 대화보단 중·러와 밀착할 때' 판단…"핵보유국 인정 등 요구하는 것"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러브콜'을 끝내 외면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을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핵보유 세력)로 지칭하는 등 이런 저런 유화 제스처를 취하긴 했지만, 핵 능력을 키우고 중·러와 밀착으로 제재 내성을 키운 북한의 호응을 끌어내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대통령은 29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진심을 아직은 제대로 다 수용하지 못해 불발되긴 했다"며, 이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계기 북미 정상 회동 무산을 사실상 공식화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아시아 순방을 앞두고 여러 차례 김 위원장에게 만나자는 신호를 발신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아시아 순방길에 오르면서 북한에 대해 "일종의 뉴클리어 파워"라고 언급했고, 26일에는 김정은과 만나면 대북제재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27일에는 "나는 한국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바로 '그쪽으로'(over there) 갈 수 있다"며 아시아 순방 일정을 늘리거나 직접 북한에 발을 들일 가능성도 시사했다.
그런데도 2019년 6월 '판문점 깜짝 회동'이 재현되지 않은 것은 북한의 상황이 그때와는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크게 고도화했고, 러시아와 동맹관계와 중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제재에 대한 내성도 키웠다.
6년 전만큼 제재 해제를 위해 미국과 대화에 나설 절박함이 사라진 것이다.
김 위원장이 직접 내세운 미국과 대화 조건도 충족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지난 9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만약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고 현실을 인정한 데 기초하여 우리와의 진정한 평화 공존을 바란다면 우리도 미국과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핵보유국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비핵화 목표를 포기한다면 미국과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북한이 원하는 건 제재 해제를 수반하는 정치적 의미의 '핵보유국'인데,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군사적 의미로 '핵무기가 있다'는 것에 가까워 김정은 위원장 입장에선 불만일 수 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28일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약속'을 확인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대화에 나서도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자칫 사진만 찍고 빈손으로 돌아서는 2019년 2월의 '하노이 노딜'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장은 "김 위원장의 요구는 비핵화 협상이 아닌 핵군축 협상 제안을 공식화하든, 제대로 발표하든 하라는 것"이라며 "대화 시작의 문턱으로 핵보유국 인정과 한미연합훈련 및 전략자산 전개 중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봤다.
또한 당장은 성과가 불확실한 미국과 대화 재개보다는 러·중과 밀착으로 얻는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미 외교의 핵심인 최선희 외무상이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이 예정된 상황에서도 러시아로 출국한 게 그 방증이다. 최 외무상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예방하고 "조로(북러) 관계의 부단한 강화 발전"을 논의했다.
두진호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유라시아센터장은 "북한으로서는 중·러와 공조하며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얻을 것을 얻어 전략적 지위를 더욱 다진 상태로 대미 협상에 나서는 것이 더 유리하다 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30일부터 2박 3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상황도 고려했을 수 있다. 북미 정상회동이 발표되면 시 주석이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뺏는 느낌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이 30일까지 한국에 머물러 아직 시간이 있는데도 한미 정상이 이날 '북미 정상 회동' 불발을 공식화하면서 북한이 미국 측에 '만남이 어렵다'고 통보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