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석의 동서남북

수필가, 목사

  • 느티나무가 보여준 희망

     수원에 있는 단오 어린이공원에는 수령이 무려 500년이 넘고 높이는 33m가 넘는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부터 단오절이 되면 사람들이 나무 주변에 모여서 전통놀이를 즐기던 유서 깊은 나무라고 합니다. 1790년 정조 때 이 나무의 가지를 잘라서 수원화성의 서까래를 만들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나라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이 나무가 구렁이 소리를 내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 아내의 손

     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이 땅에 도래한 지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정신의학 박사인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생존자들과 함께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손에 마음을 집중했다. 꼭 다시 만나 아내의 손을 한 번 더 잡아보고 싶었다. 이러한 생각이 지옥 같은 순간순간을 버티게 했다." 


  • 당연히 해야 할 일

     1919년 3월 5일 당시 경찰의 신분이던 정호석 님은 경찰관 옷을 벗고 자신의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딸이 다니고 있는 학교에 들어가서 힘껏 외쳤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그 외침을 들은 딸과 어린 학생들이 뒤를 이어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때 체포된 정호석 님은 일본 검사 앞에서 당당히 말했습니다. "삶에 쪼들리고 있는 2천만 동포를 구하기 위해 각오하고 한 일이니 목숨이 아깝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진정한 우정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지만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자라서 판사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서로 바쁘게 살면서 만나는 일은 뜸했지만 그래도 둘은 서로를 끔찍이 생각하는 우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 지금이 시작할 때입니다

     미국과 캐나다를 가로지르는 높이 48m 너비 900m에 이르는 거대한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습니다. 이 폭포는 '천둥소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말 그대로 땅을 뒤흔드는 거대한 굉음을 일으킵니다. 하얀 물안개와 주변의 절경을 배경으로 한 무지개로 인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을 모으는 아름다운 명소 중에 하나입니다. 폭포의 매력 가운데 하나를 들라 하면 단연 폭포 위에 걸려 있는 무지개다리 (Rainbow Bridge)입니다. 이는 미국과 캐나다에 걸쳐서 질긴 금속 와이어와 단단한 발판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폭포 사이를 연결한 다리의 시작은 가느다란 실 한 가닥이었다고 합니다. 현수교 설계시공 전문가인 Charles Ellet Jr 는 1847년 연을 띄워 연줄을 통해서 다리의 양쪽을 연결했습니다. 연줄에 코일을 매달아 잡아당겼고 다음에는 가는 코일에 약간 더 강한 철사를 그리고 철사에는 다시 밧줄을 매달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밧줄에 케이블을 매달아 잡아당겼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케이블을 이용해서 다리를 놓기 시작했고 마침내 폭포 위에 무지개다리가 놓일 수 있었습니다. 그 엄청난 공사의 시작이 한 가닥의 가느다란 실에서 시작되었던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임금이 내린 털모자

     조선시대 백성의 의무인 군역과 부역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강제로 끌려 나와서 갖은 핍박 속에 노동을 강요당하는 가운데 추위에 얼어 죽고 더위에 지쳐 죽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원화성을 건설한 정조 임금은 달랐습니다. 그는 성을 건축하기 위해 이주해야 하는 백성에게 모든 이주비용과 새 집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부역에 동원된 모든 백성에게 정확한 임금을 지급하는 일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 어른이 되는 용기

     한 남자가 좁은 골목길을 걸을 때 어린아이가 골목을 가로막은 웅덩이 앞에서 주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왜 웅덩이를 뛰어넘지 않고 있니?" 그러자 아이는 울상을 지으면서 대답했습니다.


  • 마음을 움직이는 바람

     한 스승에게 두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라이벌 의식이 있어서인지 그들은 사사건건 의견충돌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면서 다른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바람이 부니까 나뭇가지가 움직이네." 그러자 다른 제자가 정색을 하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식물인 나무가 어떻게 혼자 움직이겠어. 나무가 아니라 바람이 움직이는 거야." 그들은 움직이는 것이 바람이다 아니다 하고 말싸움을 시작했다가 결국 고함을 치는 큰 싸움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 형조판서가 된 노비 반석평

     조선 시대 노비의 신분을 벗어나 벼슬까지 오른 인물 중에 장영실이라는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노비에서 형조판서까지 오른 또 하나의 인물이 있는데 바로 반석평입니다.


  •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늘날 많은 장애인이 아직도 편견과 차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조선 시대에는 이들을 위한 훌륭한 정책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장애인과 그 부양자에게는 각종 부역과 잡역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특별히 장애인에 대해서 죄를 저지르게 되면 그 처벌이 가중되기도 했습니다. 장애인에게 특혜를 주는 동시에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관직에 등용하는데 있어서도 장애인을 조금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초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허조라는 사람은 척추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중종 때 우의정을 지낸 권균은 간질장애인,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는 지체가 불편한 장애인이었습니다.   영조 때 대제학에 오른 이덕수는 청각 장애인이었지만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태종 때는 명통시 (明通侍)라는 시각장애인 단체를 조직하여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는 등 국가행사를 주관 하도록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조상들은 오늘날보다 더 장애인에 대해 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세종실록'에 전하는 박연의 상소에도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 악사는 앞을 볼 수 없어도 소리를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장애인을 대하는 참된 지혜를 터득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식을 버리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높낮이를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이나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각 사람은 밖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따름이지 드러나 있는 장애인들보다 더 많은 장애를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박연이 얘기한 것처럼 이 땅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직 겸손으로 장애인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