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귀근 기자 = 6·25전쟁 발발 직후 피난길에 국군에 입대했다가 전사한 남편의 유해와 유품이 68년 만에 아내의 품에 안겼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6일 오후 경남 통영에서 6·25전쟁 때 전사한 고(故) 김정권 이등중사(1928년생)의 유품 등을 가족에 전달하는 '호국의 영웅 귀환' 행사를 한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는 국방부 유해발굴단 측이 김 이등중사의 참전 경로와 유해 수습 과정 등을 설명하고, 전사자 신원확인 통지서와 국방부 장관 위로패를 비롯해 단추, 칫솔, 버클 등 유품이 담긴 '호국의 얼' 함을 전달하는 순으로 진행된다.

김 이등중사의 유해는 작년 10월 24일 경기도 파주시 박달산의 무명 170고지에서 발굴됐다. 발굴 당시 국군 유해로만 추정됐으나 이후 정밀 감식과 전사자 유가족의 유전자(DNA) 데이터 비교 분석을 통해 지난 7월 신원이 확인됐다.

앞서 오랜 세월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아들 김형진(69) 씨는 2010년 고모와 함께 통영보건소에서 전사자 신원확인을 위한 DNA 시료 채취에 참여했다. 이 시료 채취로 68년 전 어머니와 헤어진 아버지의 신원을 극적으로 확인하게 됐다.

1928년 경북 의성군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 이등중사는 1946년 아내 이명희(89) 씨와 결혼했다. 당시 아내는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한국어가 서툴렀으며, 이런 아내를 위해 밤마다 한글 공부를 가르칠 정도로 자상한 남편이었다.

1950년 7월 아들 김형진 씨를 낳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이들 부부도 전쟁의 화마는 피해갈 수 없었다. 23살의 건장했던 청년은 1950년 8월 31일 피난길에 국군에 입대했고 갓 낳은 아들을 업고 두려움에 떨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아내와의 마지막이 됐다.

김 이등중사는 경산·영천 일대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1사단에 배치됐다. 이후 낙동강 방어선 전투와 평양 탈환 작전에 참여하며 평안북도 운산지역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거센 공세로 국군은 다시 임진강까지 후퇴했으며, 김 이등중사는 임진강과 서울 서북방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치열한 공방을 펼쳤던 델타방어선전투(1951.4.25~4.27)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편의 귀환 소식을 들은 아내는 "이제라도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라며 그간 참아왔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아들 김 씨도 "13만3천여 명의 미수습 전사자 중 유해를 수습한 분이 1만 분이고, 그중 유전자가 일치해 가족 품으로 돌아온 분이 단 128명뿐이라고 들었다"며 "129번째로 아버지가 우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셨다. 확률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귀환"이라고 말했다.

그는 "DNA 확인 결과 부자 관계로 확인된다는 통보를 받은 날짜가 7월 5일이었는데, 이날은 내 생일이자 아들의 생일이었다"며 "아버지는 신기하게도 아들과 손자의 생일에 돌아오셨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신원이 확인된 김 이등중사의 유해는 유가족과 협의를 거쳐 추후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한편 6·25전쟁 이후 미수습된 유해 13만3천여 구 가운데 현재 1만여 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이 가운데 129구만 신원이 확인되고 나머지 유해는 신원확인을 하고 있다. 신원확인을 위해서는 유가족의 DNA 시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까지 DNA 시료 채취에 참여한 유가족은 3만2천여 명으로, 미수습된 유해 대비 24% 수준에 불과하다. 국방부는 내년에 유가족 DNA 확보 인력을 지금의 4배로 늘릴 계획이다.

국방부 이학기 유해발굴감식단장(대령)은 "보건소, 군병원, 예비군 동대 등을 방문하면 시료 채취 키트를 이용해 간단하게 DNA 시료를 채취할 수 있다"며 "유가족 중 한 분만 참여해도 10년, 20년 후에 발굴되는 유해와도 DNA 비교 분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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