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검찰 제시한 증거 상당 부분 가능성과 추정만으로 이뤄져"

'제주판 살인의 추억'도 같은 취지로 무죄 선고

(제주=연합뉴스) 백나용 기자 = 제주의 대표적인 장기 미제 사건 중 하나인 '변호사 피살사건'의 피의자가 22년 만에 검거돼 구속까지 됐으나 직접 증거가 부족해 다시 미궁에 빠지게 됐다.

법원이 이모(당시 45세) 변호사 살인 혐의로 구속기소 된 피의자 김모(56) 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경찰과 검찰은 피고인이 한 방송 인터뷰에서 살인을 교사했다고 발언한데다 수사 과정에서도 범행을 인정하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고 주장했다. 또 그 외 여러 관련자의 증언 등 간접 증거를 통해 유죄를 입증하려고 힘썼다.

그러나 재판부를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범죄의 증명이 없다"

제주지법 형사2부(장찬수 부장판사)는 17일 살인 혐의로 구속기소 된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성명불상의 인물이 발각될 위험을 감수하고 피고인에게 살인을 지시했을지부터가 의문"이라며 "피의자 진술 외 별다른 추가 증거가 없고, 검찰이 제시한 증거 중 상당 부분은 단지 가능성과 추정만으로 이뤄진 것이어서 이 부분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부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간접증거만으로 유죄를 인정하려면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사실이 증명돼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셈이다.

다만 재판부는 피고인을 향해 "법률적 판단이 무죄라는 것"이라며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검찰 공소사실에 따르면 제주지역 조직폭력배 유탁파의 전 행동대원인 김씨는 1999년 8∼9월 "골치 아픈 문제가 있어 이 변호사를 손 좀 봐줘야겠다. 절대 봐주면 안 된다"라는 누군가의 지시와 함께 현금 3천만원을 받았다.

범행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위임받은 김씨는 동갑내기 조직원 손모 씨와 이 변호사를 미행하며 동선과 생활 패턴을 파악하고, 구체적인 가해 방법을 상의하는 등 범행을 공모했다.

이들은 검도유단자인 이 변호사를 제압하기 위한 범행도구를 결정했으며, 검사 출신인 이 변호사에게 단순 상해만 가했을 경우 사회적 파장이 일고 결국 덜미가 잡힐 것으로 보고 공모 단계에서 살해까지 염두에 뒀다.

손씨는 결국 같은 해 11월 5일 오전 3시 15분에서 6시 20분 사이 제주시 삼도2동 제주북초등학교 인근 노상에 있던 피해자를 발견하고 흉기로 피해자의 가슴과 복부를 3차례 찔러 살해했다.

이 사건은 김씨가 2020년 6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살인을 교사했다고 자백하는 취지의 주장을 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 올랐다.

경찰은 곧바로 재수사에 착수해 지난해 4월 김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고 인터폴에 적색수배를 요청했다. 캄보디아에 체류하던 김씨는 지난해 6월 불법체류 혐의로 현지에서 검거됐으며, 같은 해 9월 제주로 압송됐다.

경찰은 김씨에 대해 살인 교사 혐의를 적용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지만, 검찰은 사건 당시 김씨가 구체적인 범행 지시를 내리는 등 범행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고 공모공동정범 법리를 적용했다.

공모공동정범이란 2명 이상이 범죄를 공모한 뒤 그 공모자 중 일부만 실행에 나아간 경우 실행을 담당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공동으로 범죄 책임이 있다는 법리다.

◇ 직접 증거 없는 유사 사건들 '무죄'

2009년 이른바 '제주판 살인의 추억'으로 불린 보육교사 살인사건도 3심까지 이어진 재판 끝에 법원은 간접 증거만으로 피고인 A씨의 유죄를 입증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봤다.

50대 A씨는 2009년 2월 1일 자신이 몰던 택시에 탄 보육교사 B(당시 27세)씨를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치자 살해한 뒤 시신을 제주시 애월읍 한 농로 배수로에 유기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장기 미제 사건이었지만 경찰이 2016년 미제 사건 전담팀을 꾸려 이 사건 수사를 재개하며 유력한 용의자인 A씨를 2018년 5월 경북 영주에서 검거했다.

법정에서는 경찰이 A씨 차 운전석과 옷가지 등에서 피해자가 사망할 때 입은 옷과 유사한 실오라기를 다량 발견해 미세증거 증폭 기술로 확보한 간접증거 등을 놓고 공방이 벌어졌다.

검찰은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1심과 2심 재판부는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범행이 입증됐다고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한 2심을 그대로 인정했다.

2010년 인천에서 발생한 이른바 '낙지 살인사건'도 직접 증거가 없어 범죄 혐의를 입증하지 못한 사례다.

김모(당시 32세) 씨는 2010년 4월 19일 새벽 인천의 한 모델에서 여자친구를 질식시켜 숨지게 한 뒤 낙지를 먹다 숨졌다고 속여 피해자 사망 보험금 2억원을 챙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피해자가 숨지기 한 달 전에 생명보험에 가입했고 보험금 수령인이 법정상속인에서 김씨로 바뀌면서 김씨가 용의자로 의심을 받았다.

처음에 사고사로 종결됐다가 사건 발생 5개월 만에 경찰이 재수사에 나섰지만, 피해자 시신이 이미 화장돼 직접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유죄판결 여부가 주목됐다.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고 1심 재판부는 살인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무기징역 형을 선고했지만 2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대법원은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제출된 간접 증거만으로는 김씨가 피해자를 강제로 질식시켜 숨지게 했다고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한 2심을 확정했다.

이 같은 사례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항소해 김씨의 범죄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한 만큼 추가 수사와 재판에 관심이 쏠린다.

dragon.m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