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숙 전 사장, 1·2심 이어 대법원 무죄…임직원 대부분도 실형 피해

원청기업·경영자 책임 입증 한계…중대재해처벌법 제정 계기

(서울=연합뉴스) 황윤기 기자 =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의 계기가 된 고(故) 김용균 씨 사망 사고의 형사 책임을 원청 기업 대표에게 물을 수 없다고 대법원이 결론 내렸다.

김씨 사망 5주기를 나흘 앞두고 나온 이러한 결과에 유족과 노동계는 "법원이 죽음을 용인했다"며 "중대재해처벌법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준 판결"이라고 반발했다.

대법원 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된 김병숙 전 한국서부발전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7일 확정했다.

대법원은 "원심판결에 업무상 주의의무 위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에서의 안전조치 의무 위반, 인과관계에 관한 법리 등을 오해한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김씨는 2018년 12월 11일 오전 3시20분께 석탄 운송용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서부발전의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검찰은 사건을 수사한 뒤 2020년 8월 원·하청 기업 법인과 사장 등 임직원 14명에게 사망 사고에 대한 형사 책임이 인정된다며 재판에 넘겼다.

그러나 법원은 1·2심 모두 김병숙 전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표이사는 안전보건 방침을 설정하고 승인하는 역할에 그칠 뿐, 작업 현장의 구체적 안전 점검과 예방조치 책임은 안전보건관리책임자인 태안발전본부장에게 있었다는 이유였다.

2심 법원은 "피고인이 컨베이어 벨트 설비의 현황이나 운전원들 작업방식의 위험성에 관해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태안발전본부 내 개별적인 설비 등에 대해서까지 작업환경을 점검하고 위험 예방 조치 등을 이행할 구체적, 직접적 주의의무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함께 기소된 권모 전 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장은 1심에서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무죄로 뒤집혔다. 김씨 사망의 원인이 된 석탄 취급설비와 위탁용역관리 관련 업무는 기술지원처가 담당해 김 전 사장과 마찬가지로 직접적·구체적 주의 의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서부발전 법인 역시 김씨와의 실질적 고용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검사가 불복했으나 대법원은 원심판결에 잘못이 없다며 상고를 기각했다.

이 밖에 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 기술지원처장, 연소기술부·석탄설비부 책임자들, 백남호 전 발전기술 사장, 태안사업소장 등 10명과 발전기술 법인은 이날 유죄가 확정됐다.

이들은 업무상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 김씨를 사망에 이르게 하거나, 최소한 산업안전보건법상 요구되는 안전조치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는 점이 인정돼 대부분 금고형이나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실형을 선고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2심 법원은 "이 사건은 피고인 중 누구 한 명의 결정적인 과오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고, 각자의 업무상 주의의무를 태만히 한 결과가 서로 중첩돼 중대한 결과에 이르게 된 것으로 개개인의 과실 정도가 매우 중하다고 할 수 없다"고 집행유예 이유를 밝혔다.

김씨가 숨진 뒤 산업 현장의 안전 규제를 대폭 강화한 이른바 '김용균법'(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이 2020년 1월 시행됐고, 그에 더해 중대 산업재해 발생시 사업주나 경영 책임자를 처벌하는 중대재해처벌법도 작년 1월27일 시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씨 사건에는 옛 산업안전보건법과 업무상과실치사죄가 적용돼 원청기업과 그 경영책임자에게 형사책임을 묻지는 못했다. 새 법안이 소급 적용되지 않은 탓이다.

김 전 사장과 권 전 본부장의 경우 입증이 까다로운 업무상과실치사죄뿐 아니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까지 무죄 판단을 받았는데, 김씨와 원청기업인 서부발전 간의 실질적 고용관계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는 근로자가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하는 사정이 인정되는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다. 법원은 채용 절차와 업무 지시·감독 등이 모두 하청업체인 발전기술의 권한이었으므로 종속적 근로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반면 중대재해처벌법은 원청 업체가 하청 근로자에게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조치를 충실히 해야 하며 이를 어기면 처벌받는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사업주가 시설, 장비, 장소 등에 대해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책임이 있는 경우'라면 형사 책임이 인정돼 이전보다 인정 범위도 더 넓어졌다.

노동계에서는 이날 대법원의 무죄 판결이 중대재해처벌법의 존재 이유라고 주장했다.

이지현 한국노총 대변인은 "젊은 노동자가 밤에 혼자 일하다 사고가 나서 목숨을 잃었음에도 결국 원청의 책임은 없다는 이번 판결은 왜 중대재해처벌법이 필요한가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도 성명에서 "오늘 대법원 선고는 산안법 처벌의 한계와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의 정당성, 엄정한 법 집행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씨의 어머니인 김미숙(53) 김용균 재단 이사장은 이날 선고 뒤 대법원 앞 기자회견에서 "기업이 만든 죽음을 법원이 용인했다"고 규탄했다.

water@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