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한마디 없이 발뺌한 가해자에 법원은 9년→7년 감형

유족 "형량 너무 낮아…강간치사죄로 엄벌 필요" 재상고 요구

(춘천=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 "엄마, 가해자는 곧 감옥에서 형을 살고 나온대. 나는 절대 그걸 눈 뜨고 볼 수 없어. 내 삶, 내 인생을 망가뜨린 가해자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지난해 4월 4일 성폭행 피해자 A(18)양은 "더는 고통받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기고 가족들 곁을 떠났다.

"세상 법이 이런 줄 몰랐다. 나쁜 놈이고 벌 받아야 하는데 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울부짖었지만, 법은 A양의 아픈 기억과 고통만큼 많은 벌을 주지 않았다.

A양의 꿈과 미래를 송두리째 날려버린 가해자는 강간치상죄로 1심에서 징역 4년을 받았다.

2심 재판 중 A양이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 가해자의 형량은 징역 9년으로 늘었지만, 사건이 대법원에서 고등법원으로 되돌아온 뒤 7년으로 줄었다.

이에 A양의 어머니는 법정에서 "말도 안 된다", "내 딸을 죽인 살인자다"며 한참을 오열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피해자로서 '말도 안 되는' 판결이 나올 수 있었을까.

A양과 그 가족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든 사건은 2019년 6월 28일 일어났다.

당시 고교 1학년이었던 A(16)양은 교제 중이던 같은 학교 3학년생 B(18)군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B군은 A양과 단둘이 술을 마신 뒤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A양을 상대로 범행을 저질렀다.

전교생이 20명 안팎인 작은 학교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분리조차 되지 못한 채 수개월이 흘렀고, A양은 그사이 B군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등 2차 피해를 겪었다.

결국 A양의 고소로 법정에 선 B군은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에 있지 않았고, 당시 성관계에 동의했다. 처녀막 열상 등 상해는 강간치상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폈다.

1심을 맡은 춘천지법 영월지원은 "여자친구였던 피해자를 간음하고도 그 상황을 극복하려는 피해자에게 거짓말 등으로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며 징역 4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가족들도 피해자에게 '피고인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취지로 연락하는 등 2차 피해를 가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판결에 불복한 B군은 줄곧 범행을 부인하며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사건 이후 A양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우울증, 불면증을 겪는 등 긴 시간 고통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2심 선고를 앞두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에 재판부는 A양의 사망은 성폭행으로 인해 비롯됐다고 보고 B군의 형량을 9년으로 높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변론 종결 후 판결 선고 전 피해자가 사망한 사정을 양형에 반영하면서 피고인에게 방어 기회를 주지 않고 판결을 선고한 것은 위법하다'며 사건을 서울고법 춘천재판부로 돌려보냈다.

유족은 강간치상죄가 아닌 강간치사죄로의 공소장 변경을 원했고, 재판부도 검찰에 공소장 변경 의향을 물었으나 검찰은 끝내 공소장을 변경하지 않았다.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춘천재판부 형사2부(견종철 부장판사)는 "피해자의 사망이라는 결과가 이 사건 범행과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고심 끝에 양형기준(5∼8년) 안에서 판단했다"며 징역 7년으로 감형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2년 반이 지나도록 피해자 측에 어떠한 사과도 없이 줄곧 범행을 부인한 가운데 법원은 유가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가해자의 형량을 줄였다.

이에 유족은 물론 오랜 시간 A양 측을 도우며 사건을 지켜본 여성단체는 재상고를 통해 합당한 죗값을 묻고,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A양의 어머니는 15일 "자식을 가슴에 묻은 우리 가족의 꿈과 행복은 산산조각이 나서 회복될 수 없는데 가해자는 단 한 번도 진심 어린 사과와 반성을 하지 않았다"며 "징역 7년이라는 낮은 형량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강간치사죄로 엄벌해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어 "성폭행 피해자가 죽음의 문을 열 수밖에 없는 비참한 현실과 말도 안 되는 판결이 하루에도 수많은 성폭행 피해자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며 "더는 소중한 생명을 잃지 않도록 법 강화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민현정 강릉여성의전화 대표는 "성범죄 사건은 양형기준에 얽매여 기계적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피해자 중심으로 판단해야 하지 않느냐"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피해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원곡법률사무소 최정규 변호사는 "양형기준이 많이 상향조정되었지만, 아직도 피고인 중심에 머물러 있다"며 "법 개정을 통해서라도 피해자 관점의 고려가 지금보다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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