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숨은 영웅’93세]

93세 노병 멕시코 참전용사회장 돈 로베르토씨…한국 전사자 추모비앞에서 '눈물의 해후'


올해는 1953년 7월 27일 맺어진 6·25 전쟁 정전협정이 70주년을 맞는 해다. 한국전 당시 미국을 포함해 전세계 22개국 196만명의 젊은이들이 유엔의 깃발아래 참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이들이 피흘려 싸우며 지켜낸 동맹의 가치와 정신이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룬 토양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특파원들이 각국 참전용사들을 직접 찾아가 생생한 전투 기억과 소회를 들어보고 발전한 한국을 바라보는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연합뉴스의 기획 리포트를 연재한다.<편집자주>


'[한국 찾게 되면 나를 찾아달라' 유언 남긴 전우
지난해 방한 때 전사자 명비 찾아가 통곡 '재회’

"피로 물들었던 한강, 어린 애국자들 고귀한 희생
잿더미서 불사조처럼 솟아난 한국 발전상에 감탄"

"혹시 한강을 건너본 적 있나요? 우리는 봤습니다. 그곳엔 물 대신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1930년 6월 7일 멕시코 중부 미초아칸주의 유서 깊은 마을인 파트스쿠아로에서 태어난 로베르토 시에라 바르보사(돈 로베르토·93) 씨는 정확히 20번째 생일을 막 지난 1950년 7월 27일에 한국 해역에 도착했다. 전쟁 발발 한 달여 만이다.

▶美 해병 통신병으로 참전

그는 미군 해병 1사단 1여단 2대대 소속 통신병이었다. 멕시코는 애초 6·25 참전 16개국엔 포함되지 않았지만, 당시 수많은 멕시코 병사가 미군 소속으로 한반도에서 싸웠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간단한 모스 부호를 7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해 낼 만큼 잘 훈련된 장병이었던 돈 로베르토 씨가 한국에 첫발을 디딘 곳은 '인천'이었다.

지난 5월26일 멕시코시티의 한 호텔 로비, 지난 달 24일 주멕시코 한국대사관저에서 두 차례 만나 인터뷰한 돈 로베르토 씨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한국에서) 참전했다는 사실을 내 주변 사람들은 전혀 몰랐다"며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이야기할 만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참상을 인정해야 진전도 가능”

그는 직접 경험한 전쟁의 참상을 담담하게 말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위대한 판관은 우리에게 입을 다물 것을 요구했다고 믿어왔다"는 노병은 "(전장에서의) 경험을 표현할 마땅한 언어를 찾기는 쉽지 않다"고 부연했다.

"아군이 얼마나 큰 피해를 봤는지, 또 우리가 (적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줬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것이지요."

특히 돈 로베르토 씨는 한겨울 흰 눈 쌓인 산야에 수많은 10대의 시신이 널브러진 광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어렵게 말했다. 시신들은 "훈련받지 않은, 앳된 학생들 같았다"고 덧붙였다.

70여년이 지난 지금, 조금씩 자기 경험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있다는 그는 그간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당시 한국의 모습을 폐허 그 자체로 기억했다.

돈 로베르토 씨는 "한강을 항해해 본 적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곳엔 물이 아니라 피가 흐르던 게 생각난다"며 "거기엔 어린 애국자들이 있었다"고 표현했다.

전장에서 동료를 잃은 아픔은 현재 진행형인 듯 보였다. 참전용사 모자를 쓰고 목에 대한민국 스카프를 두른 돈 로베르토 옹은 중간중간 눈시울을 붉히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는 지난해 한국을 찾아 '옛 전우'와의 약속을 지킨 사실도 술회했다.

"어느 날 정찰 중 습격을 받아 숨을 거둔 한 전우가 혹시 한국을 찾게 되면 자신을 찾아 달라는 말을 해 그러겠다고 한 적 있었다"는 돈 로베르토 씨는 용산 전쟁기념관 측의 도움으로 전사자 명비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 눈물의 재회를 했다고 한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알마다(93), 안토니오 로사노 부스토스(89) 씨 등 다른 참전용사 등과 함께 지난해 방한했던 노병은 "신화 속 불사조처럼 잿더미에서 솟아난" 한국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당시 코로나19에 걸려 병원에서 치료받았던 그는 "의료 시스템 역시 대단했다"고 감탄했다.

한국의 전후 세대인 젊은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을 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때를 이해해 달라"는 답이 돌아왔다.

돈 로베르토 씨는 "군인들에겐 당연히 임무가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명확한 좌표를 주지만, 결국 인간들 사이의 다툼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며 "다만, (참상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진전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새로운 세대는 우리가 본 것을 상상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며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모든 한국의 젊은이는 (반대로) 뭔가를 부수는 노정이 아닌 뭔가를 세워 올리는 길만 걸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강조했다.

▶식생 연구사로 근무하다 은퇴

장진호 전투 등 4차례의 전투를 치른 돈 로베르토 씨는 전장에서 다쳐 1951년 12월 멕시코로 귀국했다. 의병 전역한 뒤 1956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공부하고 멕시코 할리스코주로 돌아와 블루 아가베(테킬라 원료 식물) 식생 연구를 했다.

돈 로베르토 씨는 우리나라 육군의 지원으로 리모델링한 할리스코주 사포판의 주택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멕시코 참전용사 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지난해 5월 한-멕시코 수교 60주년 기념 합동 군악 연주회에서 경례하는 돈 로베르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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