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군사쿠데타 지원 등 오랫동안 논란…美매체 "도살자·전쟁범죄자"

(서울=연합뉴스) 박진형 기자 = '오랫동안 찬사와 비난을 받아온 외교관'(뉴욕타임스), '세계 문제를 굽어보며 분열을 초래했던 외교관'(BBC), '미국 외교정책을 지배하면서 (여론의) 양극화를 초래한 영향력"(CNN)….

미국 외교계의 거목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 100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세계 주요 언론들은 그가 수십 년간의 오랜 경력에 걸쳐 극명한 찬반양론을 일으킨 인물이었다며 상반된 반응을 조명했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키신저의 별세에 소셜미디어 등 온라인에서 관련 반응이 쏟아지면서 그에 대한 비판도 넘쳐났다고 전했다.

그와 친했던 마이클 블룸버그 블룸버그통신 창업자는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서 키신저가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했던 공인 중 한 명"이었다며 "그의 유산은 (지난) 수십 년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여러 세기에도 세계를 형성할 것"이라고 추모했다.

하지만 키신저의 외교정책이 세계 곳곳에서 살육과 죽음, 전쟁을 불렀다며 비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으며, 그의 별세 소식에 기쁨을 나타낸 이들도 여럿 있었다.

미 온라인 매체 허핑턴포스트는 홈페이지 맨 위에 키신저의 흑백 사진과 함께 '워싱턴DC의 도살자: 전쟁범죄자 키신저가 100살에 죽었다'는 제목을 붙였다.

미 대중문화 잡지 롤링스톤도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미국 지배계급의 사랑을 받은 전쟁범죄자 헨리 키신저가 결국 죽었다"고 썼다.

키신저는 평생 미국의 국익을 위해 '레알폴리티크(Realpolitik)'로 불리는 현실주의 외교정책을 추구하면서 부도덕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고 외신은 설명했다.

그는 1971년 중국 방문을 통해 미·중 수교의 토대를 마련하는 등 데탕트를 통해 냉전 위기를 완화했다.

또 1973년 4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과 이집트 등 아랍국가를 오가는 중재 외교로 '셔틀 외교'라는 말을 탄생시키며 종전에 기여했다.

하지만 베트남전에서 북베트남의 군대·물자에 타격을 주기 위해 중립국이었던 캄보디아를 비밀리에 폭격해 최소한 5만명의 민간인 사망을 초래했다. 이후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 정권의 집권과 '킬링필드'로 이어지는 단초를 마련한 것도 그였다고 NYT는 지적했다.

1973년 칠레에서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정부를 무너뜨린 유혈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으며,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수많은 반대자를 학살한 이른바 '더러운 전쟁'을 외면했다는 비난도 받아야 했다.

그 결과 그는 이들 군사정권 하에서 빚어진 인권 침해·살상 행위와 관련된 재판의 수사 대상이 되기도 했다.

키신저는 1977년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미 컬럼비아대 석좌교수 제안을 받았지만, 학생들의 반대 시위로 임명이 불발됐다.

미국 정계에서도 그를 둘러싼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2016년 미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맞붙은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클린턴이 국무장관 시절 키신저의 조언에 의지했다고 말한 데 대해 "키신저는 이 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파괴적이었던 국무장관 중 하나"라며 비판했다.

이어 "헨리 키신저가 내 친구가 아니라서 자랑스럽다. 나는 그로부터 조언받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런 논란에도 키신저는 외곬으로 미국 국익만을 추구한 데 대해 끝까지 사과하지 않아 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

그는 자신의 행적에 대해 "외교정책에서 도덕적 완벽함을 요구하는 나라는 완벽함도 안보도 달성할 수 없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NYT는 키신저가 수십 년 동안 극명한 여론 분열을 초래해왔음을 고려하면 그의 별세 소식을 둘러싼 강렬한 반응을 키신저 자신이 접했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jhpar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