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니 대통령, 탈레반 몰려오자 부인과 급히 도피…"헬기에 다 못 실어 활주로 버리기도"

"국민 학살 막기위해" '빛의 속도'로 나라 손절
 국민들 "혼자 살겠다고…신이 징벌할 것" 분노
 행선지 모연, "최종적으론 美 택할 가능성 높아"

아프가니스탄 무장단체 탈레반이 사실상 수도 카불을 점령하자 아슈라프 가니(72)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도 더 빨리 국외로 탈출했다. 특히 탈출 당시 그는 엄청난 양의 현금을 갖고 고 간 것으로 전해졌다.

16일 AP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대사관 대변인인 니키타 이센코는 "(전날) 아프간 정부가 붕괴할 때 가니 대통령은 돈으로 가득한 차 4대와 함께 탈출했다"고 말했다. 그는 "돈을 (탈출용) 헬기에 실으려 했는데 모두 들어가지 못해 일부는 활주로에 남겨둬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가니 대통령은 전국을 장악한 탈레반이 전날 카불마저 포위하고 진입하려 하자 부인 및 참모진과 함께 국외로 급히 도피했다. 

베일에 가려진 가니 대통령의 행선지를 두고는 언론 보도가 엇갈리고 있다. 알자지라 방송은 가니 대통령이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를 향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스푸트니크 통신은 아프간 당국과 가까운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그가 현재 오만에 있다고 전했다.

이란 메흐르 통신은 가니 대통령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최종적으로 미국을 향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국민을 버리고 외국으로 급히 달아난 가니 대통령은 뒤늦게 페이스북을 통해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전날 페이스북을 통해 "탈레반은 카불을 공격해 나를 타도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며 "학살을 막기 위해 떠나기로 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만약 자신이 아프간에 머물러 있었다면 수없이 많은 애국자가 순국하고 카불이 망가졌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가니 대통령의 행동에 대해 국민은 물론 정부 내에서도 비판이 일고 있다. 가니 대통령의 라이벌인 압둘라 압둘라 국가화해최고위원회 의장은 이런 상황에서 수도를 버린 가니에 대해 신이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가니 대통령은 문화인류학 학자 출신으로 세계은행 등에서 근무하면서 경제 분야 전문가로 거듭난 인물이다. 그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에 의해 탈레반 정권이 축출되자 귀국해 재무부 장관을 맡았다. 재무부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조세 체계 확립 등 아프간 정부의 개혁을 주도한 바 있다.

카불대 총장을 거쳐 2006년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2014년 대선에 승리한 가니 대통령은 2019년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대규모 불법 선거가 자행됐다는 지적이 일었다. 그와 맞붙었던 압둘라 의장은 두 선거 결과에 모두 불복했고 결국 두 사람은 어정쩡하게 권력을 나눠가졌다.

가니 대통령은 지난 2005년 지식 콘퍼런스(TED) 강연에서 "아프간 남성의 91%가 하루에 라디오 채널 세 개 이상을 듣는데 그들에게 세계(의 이슈)가 중요하기 때문"이라며 "그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버려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16년 후 빛의 속도로 국민을 버렸다.

"할 수도 없었고, 하지도 못했다"

아프간군 정예화 실패한 美…자만심·문맹률 등 복합 요인
20년간 1조달러 투입 무용지물…"미국은 미친 짓을 했다"

아프가니스탄이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에 다시 넘어간 것은 미국이 그토록 노력한 아프간 정부군의 정예화에 실패한 것이 가장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30만 명의 아프간군은 수적으로 탈레반을 능가하지만, 미군의 철수와 맞물려 탈레반이 대대적 공세를 벌이며 진격해오자 도망치거나 항복하는 등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아프간 정권 붕괴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일어났다고 말하고, 조 바이든 대통령조차 미군이 1년 또는 5년을 더 주둔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다.

워싱턴포스트(WP)는 16일 미군 관계자들이 아프간 정부군이 경쟁력을 갖추거나 미국 의존도를 떨쳐낼 수 있을지에 근본적 의문을 품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우선 미국식 중앙집권 구조와 국방부의 복잡한 관료주의에 기반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프간 정부군과 경찰을 키워내려는 미국의 목표가 애초 자만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전직 관료는 "미국이 아프간에서 훌륭하게 군대를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미친 일이었다"고 혀를 찼다.

미군이 아프간군을 너무 빠른 속도로 밀어붙이고 있었고 이들은 따라오지 못했다는 평가다. 훈련받는 아프간인들이 동기 부족과 부패한 지휘체계 등 해소하기 힘든 어려움을 겪었다는 진술도 있다.

또 미국이 치누크 헬리콥터에서 탈출하는 법을 가르치려 했지만 연습할 헬기가 부족해 접이용 의자를 이용해 교육하는 등 열악한 훈련 환경이 꼽힌다.

어렵게 신병을 모집해도 놀랄 정도의 탈영과 이탈이 발생한 것도 난제였다. 

특히 높은 문맹률은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로 분류된다. 아프간 신병 중 불과 2∼5%만이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의 읽기만 가능했다고 한다. 숫자 세는 법, 색깔까지 가르쳐야 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정부군 규모를 20만 명에서 35만 명으로 늘리기로 해 아프간군을 훈련시키는 현장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양을 위해 품질을 희생했다'는 경고가 나왔다.

WP는 미국이 지난 20년간 아프간전에 투입한 1조 달러 중 아프간군의 훈련과 장비 구축, 월급 지급에 850억 달러 이상을 썼다며 지금 남은 것은 적의 수중에 떨어진 무기, 탄약, 보급품뿐이라고 꼬집었다.

다 철수하는데…러시아 왜 남아?
서방 각국 공관 폐쇄 불구 홀로 유지 관심 집중
탈레반 등 업고 미국 떠난 후 영향력 확대 '꼼수'

서방 각국들이 탈레반이 점령한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외교 공관을 폐쇄하고 인력을 철수시키는 가운데 러시아는 자국 공관을 유지하겠다고 밝혀 주목된다. 드미트리 쥐르노프 아프간 주재 러시아 대사는 15일 “카불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평소처럼 차분하게 일할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는 그동안 탈레반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자미르 카불로프 아프간문제 담당 러시아 대통령 특별대표는 최근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하면 더 위험한 지하드(성전) 단체를 소탕할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에 긍정적”이라고 했다.

탈레반은 아프간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이고 ‘테러 수출’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탈레반은 최근 중앙아시아를 넘보지 않겠다고 러시아에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는 미국이 떠난 아프간 지역에서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있다. 아스판디아르 미르 미 스탠퍼드대 국제안보센터 연구원은 “러시아는 미국이 후원하는 정권이 뒷마당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말했다.

'무주공산' 아프간 눈독
 중국, '일대일로' 추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친미 정부를 무너뜨리자마자 중국이 아프간에 접근할 태세다. 중국은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 추진 구상을 밝히며 차이나머니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16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영문 자매지인 글로벌타임스는 “중국은 아프간 개발에 기여할 수 있으며 앞서 제안한 일대일로를 추진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매체는 “미국 등 서방인들이 도주하면서 그들이 진행한 20년간의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며 “이제는 중국이 미래 발전을 위한 투자를 제공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은 지난 2017년 아프간 정부에 일대일로 사업 참여를 요구한 바 있지만 미국의 비협조로 무산된 가운데 미국이 4월 아프간 철수를 공식화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