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매뉴얼 없었다" 반복…주최자 없는 행사 안전문제 도마

정부·정치권, 재난안전법 개정 움직임 속 여야 온도차도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홍지인 조민정 계승현 기자 = 그동안 국민적 트라우마를 안겼던 여러 사회적 재난과 마찬가지로 15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번 이태원 참사 역시 법적·제도적 허점을 하나둘씩 드러내고 있다.

참사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고의 형태가 어떠하든 법과 제도가 촘촘하게 잘 갖춰져 있고 이를 잘 따랐다면, 당국이 제도의 구멍을 인지하고 메울 역량이 있었다면, 사고를 막지는 못해도 사상자를 줄일 수는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이번 사고는 '대규모 군중 관리'라는 측면에서 '과밀 문화'에 익숙한 우리 사회가 간과해온 측면들을 무겁게 인식하고, 개선할 부분은 없는지 냉철히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유례없는 상황'이라지만…예측 가능한 상황에 매뉴얼 부재

한정된 공간에 대규모 인파가 몰리며 발생한 이번 참사 후 가장 먼저 지적된 것은 허술한 안전관리였다. 10만 명 인파가 몰린 행사임에도 질서 유지와 사고 방지를 위한 안전대책은 부족했다.

행정안전부가 지난해 업데이트한 '지역축제장 안전관리 매뉴얼'에는 순간 최대 관람객이 1천 명 이상 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축제는 주최 측이 관할 지자체, 소방서, 경찰서 등의 의견을 수렴해 안전관리 계획을 수립하고 지자체에 제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자체는 경찰, 소방과 협의해 행사장 인근에 응급차와 안전관리요원을 배치해야 하며, 행사 개최 전체 비용 대비 1% 이상의 안전관리비를 확보해야 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이 매뉴얼은 '중앙행정기관, 지방자치단체, 민간 등이 개최하는 지역축제'에 적용되는 것으로,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이번 이태원 핼러윈 행사엔 적용되지 않았다.

김성호 행안부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은 지난달 31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에서 "주최자가 없는 행사는 유례가 없는 상황이어서 지침이나 매뉴얼이 없다"고 말했다. 1일 중대본 브리핑에서도 "매뉴얼이 없다"는 당국자들의 설명이 반복됐다.

2005년 경북 상주 시민운동장 압사 사고를 계기로 발간된 소방청의 공연행사장 매뉴얼엔 입석의 경우 0.2㎡당 1명, 즉 1㎡당 5명까지 수용하도록 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야외에서의 압사 사고에 대처하는 내용은 따로 담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소방안전 전문가는 "이번 상황처럼 구체적인 야외 압사 사고와 관련한 매뉴얼은 없는 것으로 안다"며 "정부가 인원, 건물 구조나 길의 폭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연구를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 "매뉴얼 유무보다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중요"

주최자가 없다고 해서 경찰의 질서 유지 의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인 야외 대규모 행사가 '유례없다'고 할 만큼 예측이 힘든 상황이 아니라는 점에서 "매뉴얼이 없었다"는 말로 책임을 덜어내긴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법이나 매뉴얼은 약속이지만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만든 내용을 실제로 국민이나 행사 기획자에게 알려야 한다"며 "이런 행사 전에 지자체·경찰·소방 안전 담당자간 협의체를 구성해 간담회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매뉴얼이 있어도 세밀한 기준이 미흡하거나 현장에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보건복지부는 재난 등 다수 사상자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지난 2016년 1월 재난응급의료 비상대응매뉴얼을 만들었다.

올해 1월 개정된 152쪽 분량의 현행 매뉴얼에는 재난 발생 시 기관별 역할과 지휘 체계, 재난의료지원팀(DMAT) 출동과 현장응급의료 활동 지침까지 구체적으로 담겼다.

이에 따르면 재난 현장에서는 병원별 수용능력을 실시간으로 조사하고 분산 이송을 고려해 이송하도록 했다. 사상자의 이송순위는 긴급환자, 응급환자, 비응급환자, 사망자 순이라고 매뉴얼은 명시했다.

이번 이태원 참사 때도 이러한 매뉴얼에 따라 15개 DMAT이 출동했고 현장응급의료소를 중심으로 사상자 분류와 응급처치, 이송이 이뤄졌다.

그러나 사고 직후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인 순천향대 서울병원에 우선순위가 아닌 사망자가 한꺼번에 몰리는 등 실제 운영 과정에서는 매끄럽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

군중 운집 행사가 개최되면 미리 관심을 두고 감시하다가 사상자가 발생하면 DMAT이 출동을 대기하도록 하는 등의 단계적 지침도 갑작스럽게 전개된 사고 상황에선 사실상 지켜지지 못했다.

더 큰 규모의 재난 상황을 가정해 매뉴얼을 더 세밀하게 다듬어야 지적도 나온다.

홍기정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면 사상자가 1천500명, 1만5천 명 되는 사고도 있을 수 있다"며 "그런 상황에서 수용치를 넘는 환자에 대해 어떻게 할 건지, 각 의료기관에서 얼마나 초과 수용할 수 있는지 등을 논의하고 관련 지침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 정부·정치권 제도 손질 나서…여야 온도차도

이번 사고를 계기로 일단 정부 관계부처와 지자체 등은 주최자 없는 행사에도 안전관리 방안을 마련하기로 하는 등 제도 보완 방침을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이른바 '크라우드 매니지먼트'(군중 관리)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우리 사회는 인파 관리 또는 군중 관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개발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드론 등 첨단 디지털 역량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기술을 개발하고 필요한 제도적 보완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이번 참사 이후 제도 개선 논의가 오가고 있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을 놓고 여야 간 온도 차가 확연하다.

국민의힘 성일종 정책위의장은 오전 원내대책회의에서 "주최자가 없는 행사라도 안전관리를 강화할 수 있도록 재난안전관리기본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이 전날 확대 주례회동에서 "주최자가 없는 자발적 집단 행사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고 예방 안전관리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에 국민의힘은 이달 5일까지인 국가 애도 기간 이후 입법 보완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 협의를 열 계획이다.

성 의장은 "민주당도 초당적인 협력을 말씀하셨다시피 정치권이 해야 하는 필요한 입법 마련 등을 위해 여야가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며 야권의 협조를 당부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제도 보완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이번 참사의 원인을 제도적 허점으로 규정하는 정부·여당의 시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현행 재난안전관리기본법상 이미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지역축제 안전관리계획을 수립할 의무가 규정돼 있다는 게 민주당의 시각이다. 정부·여당의 재난안전관리기본법 개정 추진 움직임이 책임 면피의 일환이라는 비판인 셈이다.

이밖에 중대재해처벌법상 중대시민재해의 적용 범위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정치권에서 제기되고 있다.

정의당 이은주 원내대표는 이날 의원총회에서 "이번 이태원 참사도 중대시민재해 적용 여부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며 "차제에 중대시민재해에 대한 법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구체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mihye@yna.co.kr